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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1915년 ~ 1950년 ?)
'민요의 여왕'으로 불린 이화자는 경기도 부평 출신이며, 1915년 생으로 추정된다. 1935년 뉴코리아 레코드에서 데뷔, 윤기와 탄력있는 목소리로 대번에 서민을 사로잡았다.

그 해 여름, 부평의 술집에 노래를 잘 부르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포리도루의 작곡가 겸 가수인 김용환이 호기심을 앞세우고 그녀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를 살피러 갔다. 그러나 그 목에서 흘러나오는 민요 [노래가락]은 놀랄 만큼 훌륭하였다. 이화자는 곧 서울로 불려 가서 뉴코리아 레코드의 전속 가수가 되었다.

뉴코리아는 김용환의 친구가 경영에 참가한 순수한 조선인 경영의 레코드회사였다.
1936년 3월 2일. 라디오 방송에 김정구 등 뉴코리아 전속 가수와함께 출연하여 [신춘], [섬 시악씨]를 노래하였다. [섬 시악씨]는 그 해 5월 신보로 발매되었다. 그 후 [시악시 열여덟], [뽕도 따고 님도 따세], [단풍이 들 때], [편지] 등을 내었다. 이 무ㅍ렵(1936년 10월 경)에 뉴코리아는 해산된 것 같고 이화자는 포리도루로 옮겨갔다. 포리도루에서의 데뷔곡은 1937년 1월 신보인 [천리몽]과 [말씀하세요 네]라고 여겨진다.

이어 [동풍이 불어오면], [네가 네가 내 사랑], [정월 보름], [실버들 너훌너훌], [금송아지 타령], [조선의 처녀], [잔월초], [아즈랑이 콧노래], [댕그랑 타령], [남원의 봄짗], [사랑의 적신호] 등을 내었다. 거리에는 가는 곳마다 이화자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변두리의 술집에서 노래하고 있는 그녀는 하루 아침에 '이천만의 여인'으로 바뀌고 말았다.

1938년 가을, 그녀는 오케 그랜드 쇼에 참가하였다. '스카우트의 명수'라는 별명을 가진 이철이 다액의 전속료를 제시하여 그녀를 빼가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어 그 해 12월 신보에서 오케 레코드에 등장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고, 손목인 편곡의 [꼴망태 목동], [님 전 화푸리]를 내었다.

김영파는 김용환의 펜네임인데, 그는 또 조자룡이란 별명도 갖고 있었다. [꼴망태 목동]은 이화자의 명성을 차음 높이는 인기곡이 되었다. 이듬해인 1939년 1월에는 그녕의 '자서전'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어머님 전 상백(상서)]으르 내어 폭발적으로 유행시켰다. 이것도 조명암 작사, 김영파 작곡의 노래이다.

그 해 [금강산 절경], [산심 야심] 등을 낸 이화자는 또 자기의 특기인 민요 [노뢔 가락], [범벅 타령]과 신민요 [신작 노들 강변], [삽살개 타령] 등을 발표하여 팬을 기쁘게 하였다. 이듬해인 1940년 4월 신보에서는 [화류춘몽], [화륜선아 가거라]로 다시 팬을 열광시켰다. 이 두 곡은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이다. 당대의 인기인이 되어, 남아 돌 정도의 돈이 들어왔으나, 거기에 따라 이화자의 콧대도 차츰 높아졌다고 한다. 그녀는 스캔들 많은 여성으로서 주변에서 남자 관계의 소문이 그칠 날이 없었다. 아무리 인기가 높고 돈이 많다하여도 작부 출신이라는 점을 마음 한구석에서 지워 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화류춘몽]의 가사는 바로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어 [추풍 낙엽], [마음의 화물차], [가거라 초립동] 등을 발표하였는데 [가거라 초립동]은 그녀의 또 하나의 대표곡이 되었다.

오케 그랜드 쇼, 조선 악극단에서도 화려한 스로트라이트를 받으며 여왕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평소부터 담배를 피우던 그녀는 어느새 아편에 손을 대게 되었다. 순회 공연 기간 중에도 아편이 떨어지면 대소동이 일어났고ㅓ, 어떻게든 아편을 구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는 그런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화자의 마지막 히트곡은 1942년 3월 신보로 발매된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의 [목단강 편지]이며 백년설의 [아들의 혈서]의 전면에 실려 있었다.

해방 후 이화자는 지난날의 인기를 배경으로 하여 무대에 서서 [꼴망태 목동], [어머님 전 상백], [목단강 편지] 등을 불러 갈채를 받기는 하였으나 아편으로 찌든 그녀는 비참한 생활 속으로 찌들었다고 한다. 1950년 3월 24일부터의 국도 악극단 무대 광고에 출연자로 이름이 올랐는데, 그후 그녀의 이름을 찾아볼 수는 없다. 이 무렵 아무도 지켜 보는 이 없이 쓸쓸하게 홀로 죽었다고 한다. 35세로 세상을 떠난 박복한 가수 이화자의 인생은 너무도 문란하고 황량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활력있고 요염한 노랫소리를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는 팬은 지금도 많다.

글 출처 : 앨범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