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송(1911년 ~ 1950년 ?)
조선 가요사에서 가수 겸 작곡가로서 이채를 띠고 재기발랄한 활약을 보인 김새송의 본명은 김송규이다. 1911년 편안남도 개천 태생으로 재능을 과시하고 클래식 기타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윽고 하와이안 기타에 매료되어 극단 연극호(演劇號)의 무대에서 연주하여 큰 인기를 얻고 명수(名手)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는 1935년 당시 젊은이에게 애창되었던 미국 팝송 'My Blue Heaven'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직접 가수로 프로 음악가의 길을 출발하였다고 한다. 가수 김해송의 첫 레코드는 오케 1936년 4월 신보로 발매된 재즈송 '캐리오카'이며 그 B면은 이난영이 부른 재즈송 '청공(靑空)'이었다. 이 무렵 그는 작곡가로서는 본명인 김송규, 가수로서는 김새송을 썼는데 1940년경부터 김해송만 썼다. 그는 1936년 4월 15일부터 조선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노래 조선]에도 출연하였다. 그해 4월 17일자 동아일보는 이 영화를 "이것은 조선에서 처음된 전 7권의 음악 영화로서 ▲구성 - 김능인 ▲음악지휘 - 최호영 ▲음악 - 오케-재즈밴드 ▲출연 - 고복수, 김해송, 임생원, 임방울, 이난영, 김연월, 강남향, 나품심, 한정옥"이라고 소개하였다. 김해송은 그해 5월 신보에서 '사나희설흠', 6월 신보에서 '청춘은 물결인가', 9월 신보에서 이난영과의 듀엣으로 '청춘 해협'과 이은파와의 듀엣으로 '꽃피는 영산포', 11월 신보에서 '불명의 눈길'등을 내었다. 이 무렵 이난영과 연애 관계에 빠졌으며 1937년에 결혼하였다. 김해송은 1937년 말에는 오케 레코드사를 빠져나온듯 하며 1938년 빅타 레코드에서 '환희의 대지', 김옥진과의 듀엣으로 '둥글 둥글 내사랑', 김복희와의 듀엣으로 '명랑한 양주'와 '흘러간 로맨스' 등을 내었다. 같은 무렵 콜럼비아에서는 2월 신보에서 김해송의 입사를 알리고 제 1곡으로 '선술집 풍경'과 제2곡에는 박향림과의 듀엣으로 '전화 일기'를 내었다. 이어 박향림과의 듀엣으로 '봄 사건', 박일연과의 듀엣으로 '청춘 삘딩', '풍차 도는 고향', '풋김치 가정' 등이 발매되었다. 그는 또 만요 '개고기 주사', '나무아미타불' 등을 불렀는데 1939년 4월 신보의 '팔도장타령'을 끝으로 오케에 복귀하였다. 오케에서는 1938년 11월 신보에서 만요 '흘겨본 가정 뉴스'를 아내 이난영과 듀엣으로 낸 후 이어 '집시의 고향', '무정사' 등이 발매되었다. 또 오케 그랜드 쇼의 무대에서 아리랑 보이즈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는 한편, 레코드 분야에서는 가수보다 작곡이나 연주에 전념한 것 같다. 작고가로서의 그는 오케에서 1937년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를 비롯, 그 해 이은파읭 '요 핑게 조 핑게', 1939년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꿈', 박향림의 '코스모스 탄식', 1940년 이난영의 '울어라 문풍지', 장세정의 '잘있거라 단발령', 남인수의 '불어라 쌍고동', 1941년 장세정의 '역마차', 이난영의 '진달래 시첩', 1942년 백년설의 '경기 나그네' 등, 또 콜럼비아에서는 1938년 김인숙의 '폭풍에 우는 꽃', 박향림의 '차집 아가씨'와 '선창에 울러 왔다' 등 숱한 히트송을 냈다. 해방 직후 악극단이 한창 성하였을 대 김해송이 이끄는 K.P.K 악단이 독보적인 활약을 보였다. K.P.K 악단은 이난영, 장세정 등 옛 오케 그랜드쇼의 사ㅡ타들과 한국 최초의 개그맨이라 불리는 윤부길이 참가, 오페레타나 뮤지컬을 다루는 등 다채로운 무대를 보여 주었다. 김해송의 편곡 감각은 뛰어나며 조선 민요를 연주할 때에도 최고조에 달하면 스윙을 하고 어느새 재즈 리듬을 타고 자유자재로 약동하여 관객은 넋을 잃고 그의 무대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1946년 문화계 전체가 좌, 우익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을 때, 김해송은 우익 진영의 인물로 결성된 대한 음악 협회의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5월 오케 레코드를 옛날 그대로의 레이블로 부활시키고 그 제1탄으로 조명암, 장세정과의 콤비로 '울어라 은방울'을 냈다. 이어 1950년까지 '백팔염주', '저무는 충무로', '선죽교', '약산 진달래' 등의 인기곡을 작곡하였다. 1950년 6월 한국동란이 일어나자 김해송은 처자를 피난시키면서도 자신은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북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과거 그의 악단에 있던 음악가 중에 한 사람이 미군 캠프 순회 공연을 한 사실을 인민군에게 고발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해송에게 배워 음악에 눈뜨고 훗날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로 유명해진 손석우는 조선 악극단의 화려한 스테이지를 연출한 이철과 김해송이 해방 후에도 오래 활동하였다면 한국 가요계는 좀 더 활기가 넘치고 변화 있는 다양한 것이 되었으리라고 애석해 하고 있었다. 글 출처 : 앨범 Review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