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복수(1911년 ~ 1972년)
고복수는 1911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교회의 선교사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보통학교와 실업학교에서는 음악으로 특대생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콜럼비아 레코드가 주최한 '전선(全鮮) 9도시 콩쿠르대회' 부산 대회에 출전하여 1등 입상하였다. 이어 서울에서 본선이 열려 9도시로부터 3명씩, 합계 27명이 서울 대표를 합쳐 경연하게 되었다. 고복수는 과제곡인 [비련]과 자유곡 [낙화암]을 노래하여 정일경, 조금자에 이어 3등으로 입선하였다. 콜럼비아에는 강홍식, 채규엽 등 인기 남성가수가 건재하였기 때문이었다고도 하고, 또 그의 소질을 간파한 오케의 이철이 맹렬하게 접근해서 스카우트에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고복수는 오케에 입사하였다. 데뷔곡은 1934년 6월 신보로 나온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의 [이원애곡]과 [타향]이며, 같은 음반의 앞뒷면으로 발매되었다. [이원애곡]에서는 유랑 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하였으며, [타향]에서는 고향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망국의 신세를 안타깝게 노래하여 만인 애창의 대유행곡이 되었다. 특히 [타향]은 우리나라 가요 황금시대를 여는 기념비적인 노래가 되었으며, 그 제목이 어느새 [타향살이]로 바뀌어 불리어지게 되었고, 고복수의 상표같이 되었다. [타향살이]에 얽힌 에피소드는 많다. 만주 일대를 순회하고 있던 고복수 일행이 하얼빈 공연을 하였을 때였다. 그가 무대에서 [타향살이]를 노래하자 청중도 함께 흥얼거렸고, 노래가 끝나면 앙코르로 다시 부르고 부르고 하다가 이윽고 대합창이 되어 버렸다. 동포가 가장 많이 흘러 들어와 살며 밀집하여 있던 용정 공연에서는 [타향살이] 노래에 청중이 흐느껴 울었고, 고복수 또한 흐느껴 극장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 해 1934년 [휘파람]을 히트시킨 그는 이듬해인 1935년 또 하나의 대표작 [사막의 한]을 출반하였다. 역시 김능인 손목인 콤비의 작품인 이 노래는 경쾌한 템포의 노래이지만, 망국의 서러움을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에 의탁하여 널리 애창되었다. 오케의 간판 스타가 된 고복수는 1937년에 정월 신보에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의 [짝사랑], [흑장미]를 내어 크게 히트하였다. 같은 박영호, 손목인 콤비의 작품 [고향은 눈물이냐]에서는 연극인 심영이 대사를 취입하였다. 그는 또 이난영과의 듀엣으로 [봄소식]등, 이은파와의 듀엣으로 [풍년송], [새날이 밝아오네] 등을 불러 좋은 평을 얻었다. 오케 그랜드쇼, 조선 악극단의 무대에서도 활약한 고복수는 1939년 [피장파장]을 끝으로 오케에서의 녹음은 막을 내린 것 같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 3월에 빅터 레코드 소속의 스타를 중심으로 조직된 반도 악극좌(김용환 주관)에 가입하여 조선악극단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는 여기서 황금심이라는 일생의 반려와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로맨스를 꽃피우게 되어 무대에서 또는 이동하는 열차 속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1941년 고복수는 황금심의 집안에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에 골인하였다. 두 사람은 '고복수와 그 악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있던 재일 조선인의 위문 공연을 하였다고 한다. 1944년 고복수는 시라도리(白鳥) 위문단의 부단장, 조양 악극단 단장을 역임하여 공연활동을 계속하는 동안에 해방을 맞이했다고 한다. 해방 후 고복수와 황금심은 '고복수와 그 악단'을 이끌고 활동하였으나 실패, 그후 전옥의 백조 가극단의 멤버가 되었다. 6.25동란이 일어나자 고복수는 인민군에게 연행되었으나, 평안남도 순천 근처에서 탈출하여 한국군에게 돌아왔다. 그 후 그는 육군 정훈공작대에 지원하여 활동하였다. 1958년 7월 고복수는 명동의 시공관(市公館)에서 백여 명의 후배 가수들의 찬조 출연을 받고 은퇴공연을 하였으며, 또 전국 순회 공연도 가졌다. 그후 택시회사를 설립하였으나 경영이 뜻대로 안 되었다. 1959년에는 영화 [타향] 제작에 출자하였으나 흥행에 실패하여 큰 빚을 지고 말았다. 그 무렵 동화가요학원(東和歌謠學院)을 경영하며 후진 양성에 손을 대 이미자, [대전 부르스]를 노래한 안정애 등을 키웠다. 고복수의 노래는 애수 띤 소박한 목소리에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으로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타향살이]를 작곡한 손목인을 스승으로 모셔 연하인데도 불구하고 평생 '선생님'이라 부르고 따랐다고 한다. 1972년 2월 10일 그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목하고 61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났다. 글 출처 : 앨범 Review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