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구(金貞九, 1916년 7월 15일 ~ 1998년 9월 25일)
희로애락을 노래한 국민가수, '서울 광상곡'에 장안이 발칵 일제 강점기 하인 1930~40년대에 춤과 코믹한 몸 동작을 곁들인 김정구의 노래와 무대는 파격이었다. 대부분 가수들이 어두운 노래만을 불렀던 당시, 여자도 아닌 남자 가수가 코믹한 대화식 노래(만담)에 춤까지 춘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만큼 ‘ 왕서방 연서', ‘ 앵화폭풍' 등 김정구의 풍자적인 노래는 재미있었고 흥겨웠다. 오락만이 아닌 민족 애환을 담은 ‘ 눈물 젖은 두만강', ‘ 눈물의 국경' 등 서정가요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희노애락을 4색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노래와 모범적인 생활 덕에 그는 국민 가수 1호로 공인됐다. 그는 조그만 철공소를 운영했던 부친 김원길과 찬송가 솜씨가 특출했던 모친 김자혜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함경남도 원산시 상동에서 1916년 7월 15일 태어났다. 재담에 능했던 부친의 재질과 어머니의 노래 솜씨를 함께 이어 받았다. 동방예술단에서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했던 형은 작사, 작곡, 연주, 노래 실력을 겸비, 국내 최초의 싱어 송라이터로 불릴만한 선구자였다. 형의 아내 정재덕도 30년대 중반까지 ‘ 님이여' 등으로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 누이 김안라는 동경 동양음대에서 유학을 하고 1933년부터 ‘ 이별의 포구', ‘ 달빛 어린 바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던 인기 가수였다. 이들 삼남매는 해방 후 김용환이 이끄는 악극단에서 함께 활동을 했다. 막내 김정현도 일본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재원. 당시 그의 동네에는 신카나리아, 이인근, 테너 이인범, 원산관현악단장 이흥열 등이 살고 있었다. 물을 좋아했던 그는 어린 시절 동네친구들과 함께 송수원 해수욕장이나 명사십리 백사장을 놀이터로 삼고 놀았다. 바닷가의 수많은 추억은 가수로서의 감성을 일깨워주는 고향이 되었다. 작곡자 손목인은 ‘ 바다로 가자' 녹음을 끝낸 그를 끌어 안고 “ 이렇게 좋은 감정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처음이다. 너는 감정의 천재”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년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던 그는 성가대원으로도 활동을 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광명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공부보다는 운동과 찬송가와 그리고 휘파람 잘 부르는 아이로 유명했던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4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책방 점원 생활을 하며 YMCA에서 운영하는 원산 기독교청년학원을 마쳤다. 소년 시절, 그는 양치기, 물지게꾼, 행상, 신문배달원 등 온갖 일을 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도 모자라, 간장을 탄 찬물을 타먹기까지 했다. 그는 ‘ 음악천재'로 불린 엄격한 형에게 회초리를 맞아 가며 음악이론과 바이얼린 주법을 배웠다. 16살 때, 형을 따라 대승관 극장에 가 무성영화 음악을 대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산 관현악단과 혼성합창단원으로도 활동하며 순수 음악인으로의 꿈을 불태웠다. 17살 때 유학간 누이가 방학을 틈 타 집에 오자 4남매 가족노래 선교단을 구성해 금강산 입구 온정리 교회등 해금강 일대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이때 후에 한양대 교수가 된 형 친구인 유학생 김소동이 김정구의 노래 재능을 발견하고 가수로 나설 것을 권유했다. 순수 음악을 꿈꿨기에 망설였지만 형과 누이의 충동으로 상경을 해 충무로에 위치한 신생레코드사 뉴 코리아 에 찾아갔다. 찬송가 ‘ 돌아와 돌아와'와 미국민요 ‘ 메기의 추억'을 불러 오디션을 통과, 전속 1호 가수가 되었다. 찬송가를 불러 대중가수가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33년 녹음 연습 중에 유랑극단의 상징적 존재인 남봉명의 부름을 받고 파고다 공원 앞 조선극장의 신파 연극 막간무대에 올랐다. 무대복이 없어 학생복을 입고 만요 ‘ 서울 광상곡'을 불렀다. 서양 문화의 무분별한 모방을 풍자한 이 노래는 장내는 발칵 뒤집어 놓으며 무려 다섯 번의 앙코르를 받았다. 신인 가수 김정구는 음반 취입 전에 이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당대의 최고 여배우 최선과 대화를 주고 받는 만요 ‘ 3번 통 아가씨'를 비롯해 ‘ 어머님의 품으로' 등 2곡을 취입해 데뷔SP음반을 발표했다. 두 곡 모두 친형 김용환의 곡이었다. 노래 가사가 인쇄된 전단지가 뿌려지고 종로와 을지로의 음반 가게에 벽보가 나붙고 유성기판을 통해 그의 노래가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좋은 반응을 얻고 고향 원산으로 내려가 쉬고 있던 중 ok레코드 문예부장 김성흠이 찾아 와 스카우트 제의를 해 다시 상경했다. 그는 제법 유명 가수가 되어 있었다. 월300원의 거금을 벌며 철마다 3벌 이상의 양복을 맞춰 '양복이 제일 많은 장안의 멋쟁이'로 불렸다. OK레코드는 김정구 외에도 장세정, 송달협을 함께 스카웃 했고 서정 가요의 제왕 남인수도 합류했다. 입사동기 장세정의 ‘ 연락선을 떠난다'와 함께 ‘ 항구의 선술집'을 발표했다. 빅 히트가 터졌다. 전국의 주점에선 젓가락을 두드리며 그의 노래 ‘ 부어라 마시어라'를 부르며 목청을 드높이는 청년들이 넘쳐 났다. 일제의 탄압에 입과 귀를 봉쇄 당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담은 ‘ 항구의 선술집'은 가수로의 기반을 다져준 첫 히트곡이었다. 창경원 벚꽃가지마다 김정구의 사진을 주렁주렁 매단 사진을 썼던 신보 '창경원 벚꽃'의 사진 홍보는 큰 화제가 되었다. 1938년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해였다. 2월의 빅히트 곡 '왕서방 연서'는 그 서막이었다. 이가 빠진 중국인 분장을 하고 바보 같은 제스처로 세태를 풍자했던 김정구는 최고 인기 가수로 솟아 올랐다. 대표곡이자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 눈물젖은 두만강'도 이 때 발표되었다. 12월에 발표한 생동감 넘치는 ‘ 바다의 교향시' 역시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눈물젖은 두만강에 담은 민족의 애환과 독립의지 국민가요 ‘ 눈물젖은 두만강’은 1935년 여름, 악극단 예원좌의 일원으로 두만강 유역의 도문에 공연 갔던 작곡가 이시우가 만들었다. 당시 여관에서 쉬고 있던 이시우는 먼길을 찾아 와 독립군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한 어떤 여인의 통곡에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두만강의 정경과 여인의 통곡에서 민족의 한을 느낀 그는 멜로디가 떠올랐다. 공연 마지막 날, 소녀 가수 정성월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노래의 사연을 소개하자 공연장은 이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일생의 역작을 작곡한 이시우는 이 노래를 정식 음반으로 남기고 싶어 인기 가수 김정구를 찾아갔다.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김정구는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가 음반 제작 허락을 받아 내고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1절밖에 없던 노래를 3절까지 완성시켜 취입을 했다. 노래가 발표되자 김정구는 무대에서 이 노래를 꼭 불러야 했을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다. 김정구는 최초의 음반사의 전속연주단인 OK 연주단과 함께 전국을 순회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며 OK 악극단은 북경, 상해, 만주, 일본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는 한편 이름도 조선악극단으로 변경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멤버는 작곡과 반주 박시춘ㆍ 손목인ㆍ김해송, 가수 남인수ㆍ고복수ㆍ김정구ㆍ송달협ㆍ이난영ㆍ장세정ㆍ백설희 등 가히 최강의 라인 업이었다. 당시는 남인수와 김정구의 라이벌 시대. 두 사람의 공연 후에는 항상 장안의 기생 인력거가 길게 줄을 섰다. 김정구의 한달 수입은 당시 집 2채에 해당하는 거금 1,000원에 달했다. 그가 출연했던 서울의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전신)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은 입장권을 사려는 관객들이 건물 둘레를 뱀이 또아리 틀 듯 휘감았다. 그가 종로거리를 걸으면 거리가 마비되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달리던 전차가 멈추기까지 했다. 두만강 부근 공연 때, 일본 경찰에 잡혀 남편이 옥사해 소복을 입고 있던 한 여성 관객이 사연과 함께 노래를 듣고는 두만강에 투신 자살을 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며 ‘ 눈물젖은 두만강’은 더욱 널리 불리워졌다. 이에 일제는 ‘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라는 멍에를 씌웠다. 평양 금천대좌공연 때는 ‘ 낙화삼천’을 노래하자 조선인 일본 경찰이 “ 노래가 불온하다”며 경찰서로 끌고 가 사흘동안 고문을 했다. 또한 ‘ 타향술집’에선 “ 술잔을 기울이며 외로이 우나니”라는 부분을 두고 “왜 외로이 우느냐?”며 문제 삼기도 했다. 무대 장치 가운데 태극선이라도 그려지면 무조건 문제 삼던 시절이었다. 동경 공연 때는 ‘ 유쾌한 봄소식’에서 “ 긴자의 버들이 넘실넘실”부분의 “ 넘실넘실”을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부르자 감격에 겨운 유학생들이 무대위로 올라와 그를 얼싸 안았다. 그 때문에 경찰에 끌려 가 조사를 받았지만 그의 숙소에는 유학생들이 가져 온 꽃다발이 넘쳐났다. 하지만 총독부의 강요에 견디지 못하고 전쟁을 독려하는 영화 ‘ 너와 나’에 백마강의 뱃사공으로 출연해 주제가 ‘ 낙화삼천’을 부르는 수모도 겪었다. 그는 일본 패망 직전인 동경에 볼모로 잡혀있던 조선 영친왕(이은)과 방자여사를 위해 열었던 아카사카 별궁 공연을 가장 잊지 못했다. 1943년, 27살의 청년 김정구는 춘천 처녀 조남진과 결혼을 해 2남 4녀를 두었다. 해방 후에도 영화 ‘ 눈물젖은 두만강’에 출연해 꺼지지 않는 인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형 용환과 함께 결성한 태평양가극단의 지방순회공연이 실패해 모든 재산을 날리는 좌절도 겪었다. 정부 수립에 이어 6ㆍ25 전쟁이 터지고 9ㆍ28 수복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날아든 두 발의 포탄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1ㆍ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 풀 빵 장수를 해 연명을 했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외국 팝송과 현인, 박재홍 등 후배들에 밀려 입지를 잃어 갔다. 1961년, 한일관계가 새로운 장을 맞기 직전에 재일 동포 위문 공연을 떠나 동경을 비롯해 6개 도시 순회 공연을 열었다. ‘ 눈물젖은 두만강’, ‘ 왕서방 연서’, ‘ 바다의 교향시’ 등 700여 곡을 남긴 그는 1967년 서울시장공로상, 73년 국방부장관상에 이어 1980년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6년 2월, 퍼시픽호텔 홀리데이인 서울에서 열흘동안 대중가요 사상 최초의 회갑 기념 공연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밤무대는 물론 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서 평양 공연, 87년 미주 해외교포 위문 공연 등에 참여했다. 87년 KBS 가요대상 원로가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90년 MBC TV ‘ 토요일 토요일은 胄탓?에서는 그의 55년 가요인생에 대해 특집방송을 했다. 하지만 92년 노인성 치매로 “ 이제는 눈물젖은 두만강 가사도 깜빡 깜빡한다”며 요양차 미국으로 건너갔다. 6년 후, 병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98년 9월 25일 향년 82세로 LA에서 세상을 등졌다. 2000년 8월, 가수분과위는 두만강변에 연변조선족전통문화연구센터를 세우고, 도문성 옛 두만강나루터에는 ‘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비 건립을 추진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개화기부터 60여년 동안 활동을 이어오며 산증인 역할을 했던 국민가수 김정구. 고 현인도 “ 스타 이전에 인간적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셨고 노래에 앞서 항상 바르고 검소한 생활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생전에 회고했었다. 그의 노래 ‘ 눈물 젖은 두만강’'은 한국 대중 음악사상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불멸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규성 -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