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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1921년 ~ 2003년 2월 16일)
장세정은 192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생후 2개월만에 어머니를 잃었으며, 항일 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아버지와도 생이별하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하는 소녀로 알려진 그 녀는 오케의 전속 가수가 되기 직전인 1936년 11월 평양방송국의 개국 기념 무대에 올라 갈채를 받았다.

당시 그녀는 평양의 화신백화점의 상신(常信)악기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때 스카우트의 명수인 오케의 이철이 사전에 입사가 내정되어 있었던 콜럼비아에 선수를 쳐서 그녀를 데려갔다고 한다.

장세정의 테뷔곡은 [연락선은 떠난다'이며, 1937년 2월에 임시 발매되었다. 이 노래는 발매되자마자 크게 히트하여 장세정은 하룻밤사이에 '가요계의 신데렐라'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조선의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기(下關)를 잇는 관부연락선은 피와 눈물로 점철된 조선 미놎ㄱ의 한(恨)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거기에는 토지를 빼앗기고 살 길을 찾아 건너간 조선인의 슬픔과 눈물이 얼룩졌고 그릐고 말기에는 강제 반강제적으로 연행되어 일본 각지의 공장에서 혹사당한 조선인의 원성이 가득차 있었다.

그러기에 관부연락선은 일제에 의한 조선 식민지 지배의 척도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연락선은 떠난다]는 단순한 연인끼리의 이별가에 머물지 않고 목이 찢기는 듯한 이별의 슬픔을 읊어 조선인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장세정은 이어 [아시나요], [토라진 눈물], [불망의 글자], [남장 미인], [처녀 야곡], [항구의무명초] 그리고 김정구와 듀엣한 콕믹 송 [백만원이 생긴다면] 등 히크곡을 연달아 내었다. 장세정은 죽죽 뻗어나가면서도 가볍게 코에 걸리는 달콤함을 간직한, 바꾸어 말하면 총초한 색기(色氣)를 느끼게 하는 창법으로 이 노래들을 불렀다.

그녀는 1940년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잘있거라 단발령(斷髮嶺)]을 발효하였다. 이 노래는 고음을 실린 여운 있는 멜로디의 걸작이며 장세정의 청초한 목소리와 뛰어난 가창이 돋보이는 명반이다.

단발령은 금강산 서쪽 천마산에 있는 고개이며, 금강산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의 고장이다. 이 지명은 신라의 왕저(또는 고려의 태조)가 이 언덕에서 동쪽의 금강산을 내려바보면서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장세정은 이철이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여성 가수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조선 악극단의 단장 격인 이난영과의 사이에 냉기가 서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이철과의 스캔들을 감추기 위하여 한 때 일본으로 건너가 있기도 하였다. 이 무렵의 성악가 '하라 노부교(原信子)의 지도를 받았다.

1941년 3월 신보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역마차]가 발매되었다. 경쾌한 켐포가 인기를 끌었다. 해방 후 그녀는 김해송이 이끄는 'K P K'악단에서 이난영과 함께 스타 가수로 활약하였다. 이 무렵 일본서 귀국한 탱고의 밴드마스타 한두식(죠지 한)과 결혼하였으며, 악기점과 스튜디오를 경영하는 한편, '블랙 아이스 탱고 밴드'를 결성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벌였다.

장세정은 또 1948년 조명암 김해송과의 명콤비로 [울어라 은방울]을 내었다. 일명 [해방된 역마차]라고도 불리는 이 노래는 남한에서 처음 실시된 총선거(5.10총선)를 앞두고 지난날의 오케 레이블을 부활시킨 레코드에서 가벼운 폴카 리듬을 타고 애창되었다. 이어 [백팔 염주], [런던 소야곡], [태평양 로맨스] 등의 인기곡을 내놓아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6.25동란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장세정은 최대의 재산인 '노래'를 살려 극장을 무대 삼아 인기를 누렸다. 1.4 후퇴 때 몸만 빠져 대구로 내려간 그녀는 [고향초], [즐거운 목장], [샌프란시스코]를 히트시켰다. 수복 후에 서울에 올라와서는 '유니버샬 레코드'를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된 후 9년 동안 재일 교포 위문 공연을 하여 [연락선은 떠난다] 등 히트곡을 불렀다.

1970년대 초부터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어 뜻대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었고, 신카나리아가 경영하는 다방 '카나리아'에서 엤친구와 이야기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녀는 인기곡들 대부분이 월,납북 작가의 작품이라고 금지되고 만다.

얼마 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에 살게 되었으나 고혈압 때문에 거동도 여의차 않았다고 한다. 1978년 10월 14일 그녀의 노래를 아쉬워하는 재미 한국인은 로스앤젤레스의 수라인 오디토리움에서 '장세정 은퇴 공연'을 개최하여 일세를 풍미한 명가수의 꽃길을 장식해 주었다. 재미 한국인 70년의 이민 사상 처음 가진 은퇴 공연이었다. 2003년에 사망할 때까지 거주했다.

글 출처 : Album 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