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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본명은 옥례(玉禮). 목포공립보통학교(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중도에 자퇴했다. 어머니와 함께 제주도에서 생활하던 중 극장을 경영하는 주인집 아이를 돌보면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집주인이 그 노랫소리를 듣고 추천하여 순회공연 중이던 삼천가극단의 막간가수로 서게 되었다.

그후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극단을 따라 나섰다가 1932년 목포에서 태양극단에 입단, 단역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이난영이라는 예명은 이 무렵 얻게 되었다.

극단이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할 때 작사가 강사랑(姜史郎)이 이난영의 재질을 발견하여 오케 레코드 사장 이철(李哲)에게 추천하여, 오케 레코드 전속가수로 〈향수 鄕愁〉·〈종로 鐘路〉를 취입하며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1933년 11월 〈불사조〉·〈고적 孤寂〉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934년 2월에 발표한 〈봄맞이〉로 정상급 가수로 부상하였다. 그해 가사 모집에서 입선된 문일석(文一石)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인 〈목포의 눈물〉을 불러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비음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으로, 트로트와 신민요를 비롯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한 데 이어, 대중가요 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던 김해송(金海松)과 혼인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 악극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 사실혼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63년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으며, 한국에서의 공연은 1965년 삼일절 기념공연이 마지막이었다. 1969년 목포 유달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되었으며, 1986년 목포시민의 상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