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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난아(1923-1992)
시대초월한 '首丘初心' 노래의 백미
'망향초 사랑' '낭랑 18세' 등 애수·모성적 감각 감칠맛 창법
10세 이미자가 반한 가수…고향 제주에 '찔레꽃 노래비 공원'

훈풍이 불어오는 오월, 산기슭이나 볕 잘 드는 냇가 주변의 골짜기에는 하얀색, 혹은 연붉은 빛깔의 꽃이 여기저기 무리지어 피어납니다. 그 이름도 정겨운 찔레꽃입니다. 가지는 대개 끝 부분이 밑으로 처지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있습니다. 이 찔레꽃에 여러 종류가 있다면 여러분은 깜짝 놀라시겠지요.

좀찔레, 털찔레, 제주찔레, 국경찔레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대부분 하얀 꽃입니다. 하지만 유독 불그레한 꽃이 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국경찔레입니다. 흔히 찔레나무로도 불렀지요.

고향을 떠나 만리타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온 사람들은 두고 온 고향을 내내 잊지 못합니다. 아련한 추억의 스크린에 고향의 모든 것은 온통 그리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기어이 눈물방울을 적시게 하지요. 그러한 그리움의 테마들 가운데 우리는 단연코 찔레꽃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식민지와 전쟁을 통과해온 우리의 기억 속에서 고향은 항시 가난과 서러움, 눈물과 시련으로 가득했던 공간입니다. 그 어렴풋한 실루엣 속에서 찔레꽃은 언제나 향수의 단골 테마로 떠오릅니다.

바로 그 때문일까요. 1942년 가수 백난아(白蘭兒·1923∼92)가 취입한 노래 '찔레꽃'(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태평레코드 5028)은 한국인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즐겨 부르는 민족의 노래로 자리잡았습니다. 그 어떤 고난에 시달려 마음이 쓰리고 아플 때, 혹은 고향 생각에 시름겨울 때 우리가 나직하게 읊조리는 '찔레꽃'의 한 소절은 마음의 소란을 차분히 위로하며 쓰다듬어주는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로 다가옵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우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에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겁던 시절아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옛 노래는 가사를 음미하면서 곡조에 맞춰 흥얼거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래가 지닌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가 가슴 속으로 소르르 흘러들어오게 되지요. 가사를 어디 한번 훑어볼까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이라고 했으니 이 노래는 필시 만주와 시베리아를 비롯하여 바람찬 북쪽으로 울면서 떠나갔던 북간도 유랑민의 처연한 삶을 다룬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타향에서 바라보는 달과 별은 항상 서러움을 재생시켜주는 장치입니다. 고향집을 떠날 때 친구들과 이별을 하던 장면이 추억의 장막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재생되고 있습니다. '자줏빛 옷고름'은 또 얼마나 한국적인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적절한 소도구이겠습니까.

이 작품의 시적 화자는 틈날 때마다 옛 친구들과 함께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꺼내보며 눈물에 젖습니다.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다고 왈칵 돌아갈 수도 없는 것이 떠돌이 유랑민의 부평초 같은 신세이겠지요.

이 노래의 3절은 우리에게 그리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 취입된 음반을 들어보면 분명 3절까지 선명하게 들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3절은 너무도 아름답고 애잔합니다. 가슴속은 고향 그리움으로 가득하지만 이제 터를 잡은 타향에서 새로 뿌리를 내려가야만 한다는 다짐이 느껴집니다. 이 다짐을 우리는 춥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던 북간도에 '연분홍 봄바람'이 불어온다는 대목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북간도에 활짝 핀 찔레꽃을 감격스럽게 바라보며 고향 그리움을 참고 이겨가는 몸부림이 무척 대견스럽습니다.

가요곡 '찔레꽃'에는 식민지 시절, 온갖 어려움과 악조건을 극복해내고 마침내 다부진 정착의 삶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우리 겨레의 고단하지만 낙천적인 생존의 과정이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중천에 높이 떠서 슬피 우는 새를 꾀꼬리라 했는데, 이 대목은 아무래도 종달새(노고지리)가 맞을 듯합니다. 종달새도 요즘은 예전처럼 보기 흔한 새가 아니지요. 독자 여러분께서는 오늘 이 '찔레꽃'을 3절까지 일부러 소리 내어 한번 불러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른 뒤 가슴 속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찬찬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눈 쌓인 금강산을 유람하던 어느 해 겨울, 만물상 가는 길목의 금강산호텔 2층, 손님도 없는 식당에서 혼자 마이크를 잡고 부르던 북한 처녀의 '찔레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북한 처녀가 1절을 부르고 제가 선뜻 자청해서 2절을 불렀으니 뜻밖의 남북 합작이 되었지요. 눈을 감으면 낭랑하고 아리따운 목소리로 엮어가던 북녀(北女)의 노래가 귀에 쟁쟁 들리는 듯합니다. 이 노래는 북에서도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처녀는 전해주었습니다.

'찔레꽃'의 원곡을 부른 가수 백난아는 1923년 제주도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방어를 낚는 어부였다고 합니다. 본명은 오금숙이지만, 가수 데뷔 이후 태평레코드사의 선배가수 백년설이 자신의 예명에서 성을 따 백난아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예명에도 이처럼 성씨가 적용되는가 봅니다.

백난아가 가수로 데뷔한 해는 1940년, 그러니까 17세 때의 일입니다. 일제말 함경도 회령에서 열렸던 태평레코드사 주최 전국가요콩쿠르에 출전하여 2위로 뽑혔지요. 당시 심사를 맡은 사람들은 작사가 박영호, 천아토, 작곡가 김교성, 이재호, 가수 백년설 등이었습니다. 백난아의 첫 데뷔곡은 '오동동 극단'과 '갈매기 쌍쌍'입니다. 같은 음반에 실린 이 두 작품은 처녀림 작사, 무적인 작곡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아리랑 랑랑'도 비슷한 시기의 작품입니다.

원래 태평레코드사는 오케(OKHE)의 위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지만 백년설, 백난아, 진방남, 박단마 등이 전속가수로 활동하면서 대중들의 높은 인기를 집중시켰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발표했던 백난아의 대표곡들은 '황하다방' '망향초 사랑' '무명초 항구' '북청 물장수' '간도선' '직녀성' 등입니다. 이 가운데 1941년 발표한 '망향초 사랑'(처녀림 작사, 이재호 작곡)의 창법은 장세정의 히트곡 '연락선은 떠난다'에 비견될 정도로 백난아 특유의 애수와 하소연이 느껴집니다.

8·15 광복 후 백난아는 서울, 부산 등지의 방송국 전속 가수로 활동했습니다. 후배가수 이미자는 그녀의 나이 10세였던 부산 피란 시절, 동아극장에서 백난아의 공연을 보고 가수의 꿈을 품었다는 고백을 한 바 있습니다. 백난아는 1960년대까지 수많은 악극단 공연에 참가했고, '내 고향 해남도' '님 무덤 앞에' '금박댕기' '호숫가의 엘레지' '봄바람 낭낭' '낭랑 18세' 등의 대표곡을 잇따라 발표했습니다. 분단 이후 백난아의 노래는 킹스타레코드와 유니버설레코드사에서 주로 취입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들어도 어머니의 품속처럼 푸근하고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모성적 감각의 창법. 바로 이것이 백난아 노래의 빛깔이라 할 수 있지요. 식민지 후반기에 데뷔하여 1992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가수 백난아는 많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2007년 제주 한림읍 명월리에는 백난아 노래를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에 의해 '찔레꽃 노래비 공원'이 세워졌습니다. .

글 출처 : 이동순의 가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