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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갇힌 삶을 노래한 신카나리아 (1912~2006)
세상 떠난 지금도 그녀는 "열일곱살이에요"
간드러진 음색·단발의 한복차림 '영원한 소녀가수'
아흔까지 70여년 무대 서서 민중의 삶 애절히 노래
'강남제비''낙화유수''나는 열일곱살…' 등 대히트

한국가요사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가수들로서 나이 여든이 넘도록장수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생존인물로는 올해 93세의 나이로 단연 장수 랭킹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반야월(진방남), 갓 아흔을 넘긴 작곡가 이병주를 먼저 손꼽을 수 있으리라. 그리고 수년 전 94세로 세상을 떠난 가수 신카나리아(본명 申景女)를 떠올릴 수 있다.

가요계의 원로 중에 여든을 넘긴 분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손인호, 금사향, 신세영 등이 모두 여든을 넘겼다. 반야월은 청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방송 출연을 아예 사절하고 있는 형편이나, 신카나리아는 아흔까지 무대에 섰던 놀라운 가수로 기록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너무 노쇠한 신카나리아의 모습에 놀라움보다는 탄식과 비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신경녀는 191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원산은 한국음악사에서 대표적 거장들을 배출한 유명한 고장이다. 김용환, 김정구, 김정현, 김안라 등 대중음악계의 뛰어난 음악인 형제들도 원산 출생이다. 유명한 성악가 이인범, 이인근, 이옥현 남매들을 비롯해 작곡가 이흥렬도 원산이 고향이다.

어릴 적 신경녀의 집안은 몹시 가난했다고 한다.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건만 원산의 루시여자고보를 1학년까지 다니다 결국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나 몸속에서 끓어오르는 음악적 재능을 달랠 길 없어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테너 이인근의 누이동생 이옥현에게 성악의 기초를 지도받았다.

신경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 극작가 임서방(任曙昉)이 이끌던 이동악극단 성격의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가 함흥지역에서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원산의 유일한 극장시설인 원산관으로 들어왔다. 신경녀는 날마다 조선예술좌 배우와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다녔고, 그들의 연기와 노래에 도취되었다. 신경녀는 기어이 무대 뒤로 용기를 내어 임서방을 찾아가 대중예술인이 되고 싶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신경녀의 자질을 테스트 해본 단장 임서방은 맑고 깨끗한 음색과 귀염성스러운 자태에 호감이 느껴졌다. 신경녀의 노래는 마치 새장 속에서 들려오는 한 마리의 어여쁜 카나리아가 들려주는 아름다움과 같았다. 그리하여 조선예술좌 합류를 흔쾌히 수락하고, 이후 맹렬히 연습을 시켰다. 물론 이 발탁의 과정에는 임서방 개인의 취향과 특별 배려가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서 신경녀는 무대 위에서 신카나리아로 불렸고, 조선예술단과 신무대악극단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 혹은 막간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신카나리아의 첫 데뷔곡은 17세에 취입한 '뻐꾹새'와 '연락선'이란 노래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대중들의 반향을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이정숙이 불렀던 '낙화유수'('강남달'의 원래 제목), '강남제비' 등을 악극단의 막간 무대에서 신카나리아가 너무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오히려 원곡을 부른 가수보다 더욱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신카나리아의 나이 20세가 되기까지 노래와 연기를 동시에 겸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듯하다. 1932년 동아일보의 기사 한 토막은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연극시장에서 아직까지도 아모 지장이 없이 곱게 피고 있는 방년 십칠 세의 귀여운 존재 …
신카나리아양은 산골짝에서 졸졸졸 흐르는 냇물소래의 리듬처럼 청아한 목소리를 가졌다. …
연기에 있어서는 세련되지 못하였으나 대리석으로 깎아낸 듯 곱고도 정돈된 그의 얼굴이 스테지에 나타날 때에는 관객의 시선은 그의 연기보다도 미모에 집중되는 경향이 잇다.' 19세 이후로 신카나리아가 가수로서 발표한 작품의 제목은 '한숨고개', '사랑아 곡절업서라', '무궁화 강산', '웅대한 이상', '공허에 지친 몸', '눈물 흘니며', '옛터를 차저서', '돌녀주서요 그 마음', '사랑이여 굽히자 마소', '월야의 탄식', '원수의 고개', '밤엿장사', '꽃이 피면', '님 생각', '선창의 부루스', '상해 여수' 등이다.

이 가운데서 '무궁화 강산'(전수린 작사, 전수린 작곡)이란 노래는 광복 이후 '삼천리강산, 에헤라 좋구나'로 제목이 바뀌었고, 신카나리아가 무대 위에서 항시 즐겨 부르던 자신의 애창곡이었다. 일제강점 체제에서 '봄' '무궁화' '삼천리강산' 등의 단어들이 결코 사용해서는 안되는 금기어(禁忌語)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 노래의 의미는 새롭게 부각된다 할 것이다.

세월아 네월아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이내 청춘 다 늙어 가누나
강산에 새봄은 다시 돌아오고/ 이 가슴에 새봄은 언제나 오나요
세월은 한 해 두 해 흘러만 가구요/ 우리 인생 한 해 두 해 늙어만 가누나
(후렴)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와요/ 무궁화 강산 절계 좋다 에라 좋구나

신카나리아가 주로 음반을 발표했던 레코드회사는 시에론레코드였다. 가수 신카나리아에게 노랫말을 주었던 작사가는 천우학, 김희규, 전임천, 임창인, 유일, 임서방, 유도순, 노자영 등이다. 이 가운데 유도순과 노자영(노춘성)은 식민지 조선시단에서 활동하던 낭만주의 계열의 현역시인들이다. 임서방은 줄곧 신카나리아의 매니저 겸 후견인으로 도움을 주던 끝에 결국 부부가 되었다.

신카나리아 노래의 작곡을 담당하던 대중음악인은 유일, 전수린, 안영애, 이재호 등이다. 시에론레코드에서 활동하던 시절, 신카나리아는 신은봉과 더불어 시에론 최고의 음반판매수를 자랑하는 대표적 위치를 차지했다. 당시 12인치 음반 한 장의 가격이 1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카나리아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한다.

대중들의 인기를 집중시킨 음반을 당시 용어로는 '절가반(絶佳盤)'이라 불렀다. 이 용어는 실제로 음반 상표에 표시되기도 했는데, 신카나리아의 음반에는 이 '절가반'이 여러 장이나 있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를 업고 신카나리아는 요즘의 만담과 비슷한 스켓취, 혹은 난센스 종류의 음반도 가끔 취입하다가 1934년 리갈레코드사로 소속을 옮겼다.

리갈은 보급판 스타일의 저렴한 민요 음반을 집중적으로 발매하던 콜럼비아의 계열회사였다. 1938년 이후 신카나리아는 음반 발표보다 악극단 공연에 더욱 열정을 쏟았다. 빅타레코드사의 악극단, 중국 톈진의 악극단, 신태양악극단, 포리도루실연단 등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극단 멤버로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후견인이던 임서방과 이별하고, 이익(예명 김화랑)과 재혼하였다.

신카나리아 부부는 새별악극단을 창립하여 전국을 순회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신카나리아는 국방부 정훈국 소속 장병위문단의 멤버로 군부대 위문공연에 열중하였다. 1972년 회갑을 넘긴 신카나리아는 서울 충무로에서 '카나리아다방'을 열고 옛 동료가수들과 어울려 추억담을 즐겨 나누며 소일하였다.

한국가요사에서 처음으로 예명을 썼다는 가수!
소녀 같은 단발머리에 한복차림이던 신카나리아!
그 특유의 간드러진 음색으로 90세까지 기꺼이 무대에 오르던 직업적 천품(天稟)의 가수는 마침내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남긴 노래들은 거의 대부분 식민지라는 감옥에 갇힌 백성들의 슬픈 삶을 다룬 것이었다. .

글 출처 :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잊혀진 민요가수 김복희(1917 ~ ?)
인기(popularity)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에 쏠리는 대중의 높은 관심이나 좋아하는 기운입니다. 인기에만 의존해서 오로지 인기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가수와 배우들이 아닐까요. 아무리 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타라 할지라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덧없는 한 줄기 실바람이나 물거품과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1930년대 빅타레코드사의 간판가수 김복희의 경우도 바로 이 허무의 기슭에 매몰된 대중음악인으로 여겨집니다. 김복희의 생애는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구체적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나 다만 가수 자신의 인터뷰와 구술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 1917년 평남 안주 입석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12세에 부친이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가정형편이 몹시 곤궁해지자 복희의 어머니는 가족들과 평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복희는 동생의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 평양의 그 유명한 기성권번으로 들어가 기생수업을 받고 이후 기생 노릇을 하며 살아갑니다.

거기서 김복희는 나중에 함께 유명가수가 된 기생 선우일선과 동갑내기 친구로 다정하게 지냈습니다. 17세가 되던 1934년, 서울의 빅타레코드사 문예부장 이기세의 집에 머물고 있던 평양기생 곽향란이 이기세에게 김복희의 뛰어난 가창능력을 적극 추천했고, 이기세는 직원을 평양으로 보내어 곧장 서울로 불러왔습니다.

이기세가 시험해본 김복희의 가창능력은 그 솜씨가 과연 부족함이 없었을 뿐더러 파르르 떠는 발성의 울림에서 기묘하게도 슬픈 여운까지 느끼게 하였습니다. 이기세는 시인 이하윤(異河潤, 1906∼1974)과 작곡가 전수린(全壽麟, 1907∼1984)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어린 기생 김복희의 첫 음반이 반드시 성공리듬을 탈 수 있도록 신신당부했습니다. 이런 전후 사정이 1935년 잡지 ‘삼천리’ 지에 실린 글 ‘거리의 꾀꼬리인 십대가수를 내보낸 작사작곡가의 고심기’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전수린이 김복희의 첫 작품 ‘애상곡’에 대한 작곡을 먼저 했고, 가사는 작곡을 완료한 다음 시인 이하윤에게 의뢰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작곡가 전수린의 회고를 들어보실까요?

김복희의 ‘애상곡’은 실로 나의 고심을 짜낸 것입니다. 처음에 김복희가 노래를 우리 회사에 와서 부르는데 그 노래를 들음에 그 몸집같이 휘청휘청 마치 능라도 수양버들 같아서 그만 그 목청조차 몸 스타일에 따른 듯하겠지요. 그래서 그 성대를 들음에 간드러지고 늘어지고 흔들리는 것이 애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서 이 멜로디에 맞는 곡조를 지어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김복희의 노래와 맞춰보니 아주 적당하다고 보아서 내가 처음 뜻을 발표해 보았으나 되지 않고 해서 마침 이하윤 씨에게 작사를 청한 것입니다.

전수린으로부터 ‘애상곡’ 악보를 받아 기생출신 가수가 부르는 첫 발표 곡의 분위기에 맞도록 애잔하고 슬픈 정서의 가사를 붙였던 시인 이하윤은 이 과정에 대해서 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순서인즉 작사가 먼저 되고 그다음 작곡이 되고 그 후에 노래를 불러 주어야 옳을 터인데 이 ‘애상곡’은 아주 거꾸로 되었지요. 김복희의 목청을 듣고 거기에 맞을 곡을 지어주면서 이러이러한 의미에서 했으면 좋을듯하다고 하기에 내 생각해보아야 아무래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첫째 김복희가 입사해서 세상에 처음 알리는 것인 만큼 독특한 것을 내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그래서 구슬프게 가장 애상적인 그 목소리를 배합해서 짓노라고 매우 힘이 든 것이외다. 그 목소리는 보통의 목청이 아니고 갈피갈피의 눈물과 한숨이 섞인 듯 연약한 여자가 달빛 아래 홀로 서서 검푸른 못을 들여다보는 그 미묘 신비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 날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작사한 것이나, 이것을 김복희의 목에 맞춰 몇 번이나 수정했던지 사실 나로서 힘든 작사의 하나이외다. ‘애상곡’은 듣는 이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김복희는 자기의 묘성(妙聲)을 완전히 아직은 발해보지 못한 줄로 압니다. 그 목소리에 알지 못할 깊은 점은 언제나 풀릴는지 앞으로 나올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양 기생 출신 가수 김복희의 첫 데뷔 작품 ‘애상곡’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김복희의 음색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내지르는 가운뎃소리를 중심으로 그 중심소리를 한맺힌 슬픔으로 비비며 껴안는 또 다른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 같기도 하고, 가을날 숲에서 혼자 지저귀는 꾀꼬리의 하염없는 흐느낌 같기도 합니다. 어린 기생의 가창에서 어찌 이렇듯 한과 슬픔과 삶의 고뇌가 함께 어우러진 깊은 배합의 울림이 빚어져 나오는 것일까요? 김복희의 노래는 출반되자마자 장안의 큰 화제와 인기를 집중시켰습니다. 특히 지식인 계층에서 김복희의 노래에 깊이 몰입된 가요팬들이 생겨났습니다.

배우와 가수를 겸했던 복혜숙의 평에 의하면 김복희는 미인형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김복희는 뛰어난 미인은 아니나 재색을 겸비하고 성음이 뛰어난 기생 출신 가수로서의 인기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1934년에 빅타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어서 이후 5년 가까운 세월 동안 무려 87편의 가요곡을 발표합니다. 그러다가 김복희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인 1939년 4월에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기었고, 포리도루에서는 5개월 동안 11편의 가요곡을 발표하다가 가요계를 완전히 떠나면서 잊힌 가수가 되었습니다. 가수로서 마지막 발표곡은 포리도루에서 1939년 10월에 발표한 ‘엇저면 그럿탐’으로 확인이 됩니다. 가요계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시간은 도합 5년가량입니다.

김복희 노래의 특색은 ‘하로밤 매진 정’ ‘날 다려가오’ ‘탄식하는 술잔’ ‘연지의 그늘’ ‘농속에 든 새’ 따위에서도 느껴지는 바와 같이 삶의 고통 속에서 헤매는 기생의 하소연과 탄식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음정이 환하고 성량이 크게 느껴지지만 한편 부드러운 맛이 있어서 그에게는 무슨 곡조를 주든지 실패가 적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김복희 노래를 장르로 분류해 보면 신민요(민요)가 21편, 속요 1편, 주제가 1편, 재즈송 1편, 기타 모두는 유행가 장르에 속합니다. 김복희 노래에 가사를 보내준 작사가는 당대 최고의 전문인들이었습니다.

김복희가 가수로 활동하던 전성기에 세간의 평은 대체로 양호합니다. 1936년 7월 5일 자 매일신보에도 김복희 특집 인터뷰 기사가 발표되었고, 대중잡지 ‘삼천리’에는 김복희 관련 기사가 여러 차례 게재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복희가 가수활동을 하면서 평양의 기성권번 소속 기생을 겸했다는 사실입니다.

김복희의 특별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여러 대중적 무대에 단골로 초청을 받았던 경과를 볼 수 있습니다. 1935년 3월 5일 평양 금천대좌에서 열린 평양축구단후원회 주최 ‘각 레코드사 연합 유행가 실연의 밤’에 30명 가수가 한 무대에 출연할 때 김복희는 빅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참가했습니다.

경성방송국(JODK) 라디오 프로에도 자주 출연해서 자신의 대표곡들을 불렀던 신문기사가 획인이 됩니다. 이처럼 평양에서 서울로 자주 왕래할 때에는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1935년 ‘삼천리’지가 실시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에서 김복희는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 전옥에 이어서 5위의 자리에 오릅니다. 은퇴한 뒤에 김복희는 조용한 노년기를 보낸 것으로 추정이 되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1960년대에는 동아방송에 잠시 출연했던 기록이 보이고,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에서 독실한 가톨릭교회 신자로 여생을 살았다는 누군가의 증언을 듣기도 했으나 이제는 1930년대 빅타레코드사 대표가수였던 김복희는 그녀에게 갈채를 보내던 그 많은 팬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어느 바람 부는 산기슭에 홀로 쓸쓸히 묻혀있을 것입니다.

글 출처 : 이동순(영남대 국문확과 교수)의 가요이야기
일탈을 꿈꾸었던 가수 박단마(1921 ~ 1977)
여러분께서는 ‘세월아 네월아’라든가 ‘아이고나 요 맹꽁’‘나는 열일곱살’ ‘날라리 바람’ 따위의 옛 노래를 들어보신 기억이 나실 테지요? 바로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박단마(朴丹馬`1921∼92)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는 사실도 혹시 아시는지요?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듣던 이 박단마의 노래들은 동시대의 다른 노래들에 비해 유난히 리듬이나 템포가 흥겹고 자유분방하며 은근슬쩍 밀고 당기는 창법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서 음악에 대한 지식을 조금 알게 된 지금 이 노래들을 다시 곰곰이 들어보니 참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미국 재즈음악의 특징인 래그타임(ragtime), 즉 약박에서 당김음을 재치 있게 활용하는 창법과 스윙(swing)이 지니고 있는 동적, 리듬적인 분위기가 가수 박단마의 창법 속에 진작 강하게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재즈는 본격적인 음악으로 미국 서민들의 삶속에서 당당한 위상을 확보하게 되는데, 박단마는 1934년 빅타레코드사를 통해 신진가수로 데뷔했으면서도 재즈음악의 창법이 지니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자신의 가창에 적극 활용해서 가수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박단마가 미국 음악의 새롭고 첨단적인 흐름인 재즈에 대해서 익숙해 있었다기보다도 박단마의 창법 자체가 지니는 여러 다채롭고 자유분방한 요소들이 재즈음악의 특성과 절묘하게 부합되었다는 해석이 더욱 타당할 것 같습니다.

박단마는 1921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가계에 관한 구체적 자료는 확인할 길 없습니다만 극작가 이서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유년시절부터 연극무대에 섰었고, 또 권번의 기생으로 일하는 언니가 한 번씩 집에 돌아와 조용한 시간에 노래를 부르면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어깨너머로 흉내를 내었다고 합니다. 박단마의 나이 불과 13세에 박영호 원작으로 이원용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 ‘고향’에 아역배우로 출연했었다는 기록을 보면 일찍부터 대중예술가로서의 끼가 왕성했다는 사실을 추정하게 합니다. 같은 해 여름, 경성방송국(JODK)에 초청을 받아 ‘봄 맞는 꾀꼬리’ ‘거지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박단마는 16세가 되던 1937년 6월, 드디어 빅타레코드사에서 ‘상사 구백리’ ‘날 두고 진정 참말’ 등 두 곡이 담긴 음반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습니다. 요즘말로 가히 천재소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17세에 경성방송국 라디오 제2방송에 표봉천과 함께 출연해서 ‘상사 구백리’ 등을 불렀고, 19세가 되던 1940년 3월에는 김용환이 주재하는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 연기부에 멤버로 참가해서 북조선순회공연, 서울공연, 북지황군위문공연 등을 다녀왔습니다.

박단마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인 1943년 2월 제일악극대에서 징병제 진전을 위한 악극 ‘바라와 기(旗)’를 공연할 때 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모든 것이 일본의 패망을 향해 치달아가던 1943년, 박단마는 중국 천진에서 한국인 김정남이 운영하는 악극단 ‘신태양’에 들어가 손목인, 황해, 심연, 신카나리아, 오인애(무용) 등과 함께 멤버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1944년 2월 12일부터 10일 동안 매일신보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전국의 군수공장 위문격려대의 일원으로 서울, 인천 등지를 다녀왔는데, 이때의 멤버들은 손목인, 박단마 등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38년 8월 1일 ‘삼천리’지에 발표된 극작가 이서구 선생의 글 ‘유행가수 금석회상’에는 가수 박단마를 선배 가수 김복희의 후계자로 규정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그만큼 박단마의 대중예술가적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는 선배 비평가의 글이라 하겠습니다. 그 엄혹하던 식민지 시절에도 빅타레코드사를 통해서 무려 50여 편이 훨씬 넘는 가요곡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 가운데서 진작 예를 들었던 ‘세월아 네월아’, ‘아이고나 요맹꽁’, ‘나는 열일곱살’, ‘날라리 바람’ 등의 대표곡을 발표해서 대단한 인기를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일탈의 꿈을 꾸면서 그 꿈을 가창의 과정 속에 자유자재로 응용했던 가수 박단마의 놀라움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을 비롯해서 박단마가 불렀던 상당한 곡들이 대개 신민요풍의 노래였다는 점입니다. 신민요풍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어보면 흐느적거리는 창법, 가락을 짐짓 밀었다가 당기는 싱코페이션(syncopation) 창법을 자유분방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박단마가 구사했던 그 창법이 바로 스윙, 래그타임의 재즈창법이 보여주는 특성과 부드럽게 배합될 수 있었습니다.

가수 박단마의 진정한 삶은 8`15광복과 더불어 펼쳐집니다. 김해송이 주도하던 K.P.K악단과 이익이 주도하던 샛별악극단 등에 참가하면서 박단마는 발랄함이 느껴지는 독특한 율동과 애교스런 창법, 귀염성스런 가창으로 청년세대들로부터 대단한 반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K.P.K악단에서는 주한미군을 위한 무대공연을 자주 열었는데 주 멤버로 활동하던 박단마는 여기서 미국의 재즈곡과 팝송들을 멋지게 불러서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슈샨 슈샨보이 슈샨 슈샨보이/ 슈슈슈슈 슈샨보이 슈슈슈슈 슈샨보이
헬로 슈샤인 헬로 슈샤인/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아무리 피난터에 허둥거려도/ 구두 하나 깨끗하게 못 닦으시는
주변 없고 배짱 없는 고림보 샌님은/ 요 사이 아가씨는 노 노 노 노굿이래요.’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심신의 깊은 상처와 유린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던 한국인들에게 박단마가 불렀던 ‘슈샤인보이’는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크게 히트했습니다. 박단마와 다정하게 지냈던 초창기 디자이너 노라노 씨는 박단마의 추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명동의 시공관에서 열리는 박단마 1인의 라이브 쇼를 위해 나는 타프타 벨트가 달린 검은색 빌로도 드레스와 구슬을 목 밑으로 늘어뜨린 것을 디자인했다. 무당부채를 들고 나타난 그녀는 느릿한 가락으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부르다가 갑자기 갓을 벗어던지며 ‘슈슈 슈슈 슈샤인보이!’하고 빠른 템포의 노래로 넘어갔다. 그 순간 극장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었던 박단마야말로 천재적 가수이자 진정한 쇼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박단마는 그녀가 사랑에 빠졌던 미군 헌병장교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옮겨가서 살게 됩니다. 하지만 떠나온 고향이 너무도 그리워 1957년 귀국해서 ‘박단마그랜드쇼’를 구성하고 전국 순회공연을 개최합니다. 당시 공연의 슬로건은 ‘1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스테이지쇼의 프리마돈나 박단마 귀국가요제 쇼’였습니다. 1977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박단마 독집 LP음반이 발매가 되었지만 이미 박단마는 대중들에게 잊어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1992년, 71세의 할머니가 된 가수 박단마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글 출처 : 이동순의 가요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