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예술의 두 장르를 넘나든 가수, 강홍식(1902~1971)
가수 강홍식은 맨 처음 배우로서 출발하였다. 식민지 조선에 영화산업이 처음 들어왔을 때 평양 갑부의 아들이었던, 명석한 청년 강홍식의 가슴 속은 이미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예나 제나 그렇겠지만 어떤 일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는 인물들은 거의 하나같이 부지런하며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졌던 듯하다. 이런 점에서는 강홍식도 예외가 아니어서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무단가출을 했고, 바로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나가서 오페라 극단의 견습생, 배우생활 등 영화 동네에서의 밑바닥을 체험했다. 마치 환한 불빛을 보고 멀리서 나방이 홀린 듯이 달려가듯 영화라는 신문물에 대한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를 길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강홍식의 피와 가슴을 격정 속에 빠트린 것일까. 강홍식이 태어난 1902년은 우리 민족이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을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식민지 제국주의자들의 조직적 유린과 수탈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내맡기고 있던 시대였다. 무엇이든 배워야 살고, 무엇이든 벌어야 끼니를 이을 수 있던 위기감이 팽배하던 시절, 이러한 때 강홍식에겐 영화야말로 위기를 돌파하게 해줄 수 있는 진정한 통로라는 신념이 들었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강홍식에게 여러 대중 예술장르 중 가장 잘 어울리고 기질과 취향에 잘 들어맞는 역할이 생겼으니 그것이 곧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다. 공연 중 막과 막 사이의 빈 여백을 막간(幕間)이라 하는데, 이때 관객들은 무료했다. 이 무료함을 즐거움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이 바로 막간가수였다. 굵은 남저음 바리톤으로 막간에서 부르는 강홍식의 노래에 대하여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만큼 강홍식의 음색에는 묘한 여운이 들어있었다. 잃어버린 정겨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랄까. 본질에 대한 애착을 환기시켜주면서 동시에 회복에 대한 강렬한 염원으로 끓어오르게 만드는 작용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강홍식 창법의 비결이었던 것이다. 강홍식이 가수로서 본격적인 취입과 활동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일본의 유수한 레코드 회사들이 서울에 지점을 열기 시작한 그 직후의 일이다. 강홍식은 1933년 4월 포리돌레코드사에서 유행가 '만월대의 밤'(왕평 작사, 김탄포 작곡, 포리돌 19060)을 첫 작품으로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하였다. 이어서 빅터레코드사로 옮기면서 그의 가수 생활은 더욱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삼수갑산'이 뜻밖에 히트하면서 가수로서 강홍식의 주가는 한층 높아졌다. 이때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이적을 제의해 왔고, 33년부터 36년까지 세상은 온통 강홍식의 무대였다. 특히 구성진 전통적 색조의 가락과 유장한 느낌으로 실실이 이어져가는 독특한 여운 및 그러한 정서를 재치 있게 활용한 노래 '처녀총각'은 당시 피로한 식민지 백성들에게 크나큰 위안과 격려와 용기를 주었다. 전국 어디를 가든 강홍식이 부른 '처녀총각'을 흥얼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34년 2월에 발매되었던 유행가 '처녀총각'(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콜럼비아 40489). 이 한 곡으로 강홍식의 위상은 배우 경력을 가진 인기 레코드 가수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노래는 당시 극단 단성사의 음악 담당이었던 김준영의 남다른 센스와 솜씨로 만들어졌다. 서울 국일관 뒤의 어느 여관에서 극단 멤버들이 술을 마시며 시간을 즐길 때 술에 취해 거나한 강홍식이 콧노래로 '흥타령'을 불렀다. 이를 너무나 재미있게 들었던 김준영이 즉시 악보에 옮겨서 '처녀총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새싹이 돋고 훈풍이 볼을 간질이는 삼사월 봄날, 은근하고 구수한 전통적 색조가 물씬 느껴지는 이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그 봄이 더욱 흥겹고 즐거워지는 것이다. 이 음반은 무려 10만장 넘게 팔려나갔다고 하니 참으로 엄청난 매상이 아닐 수 없다. 옛 가요 '처녀총각'은 현재 남북한 모두 즐겨 부르는 노래로 분단을 뛰어넘은 몇 안 되는 가요작품 중 하나이다. 당시 어느 잡지사에서 조사한 인기투표에서 강홍식은 서열 3위에 올랐다. 34년 이후 강홍식의 대표곡으로는 '이 잔을 들고'(김안서 작사, 신진 작곡, 콜럼비아 40491) 등 10여곡이 넘는다. 작사가로서는 '범오'란 예명을 썼던 시인 유도순·김안서 등과 주요 콤비였다. 작곡가로서는 주로 김준영과 단짝을 이루었다. 참으로 씩씩한 곡조와 경쾌한 테마로 구성된 '먼동이 터 온다'(범오 작사, 김준영 작곡, 콜럼비아)는 대표곡 목록에서 빠뜨릴 수 없다. 이 노래는 동해안 작은 어촌의 아침풍경을 민요풍으로 만든 네 박자로 만들어졌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돌아오는 남정네와 그들을 기다리는 포구의 여인네들을 다룬 아름다운 한 폭의 서정적 풍경화다. '청춘타령'(유도순 작사, 김준영 작곡, 콜럼비아 40610)도 대표곡 목록에 반드시 넣어야 한다. 강홍식이 남기고 있는 노래 중 신민요 계열의 작품이 상당수이다. 그것은 강홍식의 구성진 창법과 가장 잘 배합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강홍식의 노래는 차츰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전문 가수들의 활동이 뚜렷하게 강화되면서 연극, 영화 등과 장르를 넘나드는 가수들은 현저히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게다가 트로트 음악이 전체 가요계를 휩쓰는 풍토 속에서 강홍식의 실실이 늘어지는 듯한 타령조와 전통적 색조가 느껴지는 창법은 비정하게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세월에 떼밀리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인기의 중심에서 멀어진 가수 강홍식은 연극영화계로 다시 복귀를 시도하지만 그곳도 이미 자신이 설 자리는 없었다. 남북이 분단된 직후 고향인 평양으로 떠나간 강홍식은 당시 아무런 콘텐츠도 갖추지 못한 궁벽한 북한영화계의 개척자로서 새로운 꿈과 열정을 펼치게 되었다. 그는 북한영화의 기초를 닦아놓고 1971년 세상을 떠났다. 글 출처 :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3
눈물의 여왕 전옥(1911 ~ 1969)
본명은 전덕례(全德禮). 어린 시절부터 배우를 꿈꾸다가 오빠 전두옥에게 떼를 쓰다시피 하여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전두옥(全斗玉)은 못 하는 운동이 없다고 소문날 정도로 만능 스포츠맨으로, 나운규가 감독한 무성영화에서 스턴트맨으로 자주 출연하였다. 전옥이란 예명은 오빠 두옥의 끝이름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1927년 그는 단성사에서 상연된 무성영화 〈낙원을 찾는 무리〉에서 임운학의 상대역으로 나오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같은 해 나운규프로덕션이 설립되자 입사하여 〈잘 있거라〉에서 주인공으로 나운규·김연실·이금용 등 일류 인기배우와 출연하였고, 이어 〈옥녀〉·〈사랑을 찾아서〉에도 출연하였다. 이 무렵 연극무대에서도 활동을 병행하여 화조회와 토월회에서 연기를 배웠다. 1929년 토월회에서 〈아리랑고개〉를 공연할 때 여주인공 역의 석금성이 사고로 나오지 못하게 되자, 대신 주연을 맡아 눈물 연기로 호평을 받으면서 '눈물의 여왕'이란 별명으로 단숨에 장안의 인기를 모았다. 같은 해 그녀는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강홍식과 결혼을 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배우가 강효실과 강효선이다. 훗날 강효실은 최무룡과 결혼해 최민수를 낳았고, 강효선은 북한으로 가서 인기배우가 되었다. 나운규프로덕션이 해체된 후 그녀는 1930년대 말까지 연극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가수로도 인기를 끌었다. 1933년에 포리돌레코드에서 〈째즈의 멜로디〉를 취입하여 데뷔한 그녀는 강홍식과 함께 많은 음반을 발표하였다. 1935년 〈삼천리〉가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전문 가수인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에 이어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후 그녀는 가수로서의 능력을 살려 1940년대부터는 당시 유행하던 악극 무대에서 각광을 받았다. 태평양전쟁 기간 중 친일 영화가 다수 제작될 때에는 〈복지만리〉와 〈병정님〉에 출연하였고, 남해예능대를 설립하고 군국주의 선전 공연물을 순회공연하기도 하였다. 1946년 그녀는 남해예능대를 백조가극단으로 개편하고 〈항구의 일야〉·〈눈나리는 밤〉·〈자장가〉·〈종로의 밤〉 등의 가극으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즈음 극단의 살림을 도맡아하던 최일과 재혼하였다. 악극단이 몰락하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 최일이 백조영화사를 만들어 백조가극단의 인기 레퍼토리를 차례로 영화화하자, 그녀는 악극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을 다시 연기했으나 악극에서 훈련된 과장된 연기로 인해 영화에서는 크게 평가받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962년 영화법이 개정되어 군소 영화사들이 퇴출되면서 백조영화사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그녀는 신상옥이 감독한 〈연산군〉(1962년)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아 강력한 모성과 뒤틀린 권력욕을 유감없이 선보였으며, 김기영이 감독한 〈고려장〉(1963년)과 신상옥이 감독한 〈쌀〉(1964년)에서는 무당 역을 맡아 신기 어린 카리스마를 내보였다.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육체의 문〉(1965년)에서는 시골 처녀를 팔아넘기는 악독한 포주 역으로 분하여 한국영화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독특한 악역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다. 1958년 한국무대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전옥은 지병인 신장병과 고혈압으로 1969년 10월 22일에 숨을 거두었으며, 전옥의 영결식이 10월 26일 예총회관 광장에서 전옥의 지인인 연예인 200 여명이 모인 가운데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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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연(1924 ~ ?)
1924년 일제 강점기 황해도 해주시에서 태어났다. 1926년이라는 설도 있다. 학력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41년 10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군국가요인 <백련 홍련>을 취입하며 데뷔하였다. 이해연은 당시 활동하던 다른 가수들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에 데뷔했다. 이후 <뗏목 이천 리>,<소주 뱃사공>,<아리랑 풍년>,<황해도 노래> 등을 발표하며 일약 인기 가수가 되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청란의 꽃> 등 군국가요를 여러 곡 취입하였다. 신민요를 주로 불렀으며 해방 후에는 악극단 무대에서 활약하였는데 1956년에 6.25전쟁의 비극적인 아픔을 그린 반야월 작사,이재호 작곡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러 대히트를 기록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작곡가 박춘석과 같이 작업을 하였으며 1950년대 말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60년대 초까지 음반을 취입하였으며 1984년에는 손인호와 함께 히트곡집을 발매하였다. 현재는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이다. 이해연의 여동생 백일희는 1955년 <황혼의 엘레지>를 부른 가수이고, 남편 베니 김은 치과 의사 출신이며 1950년대 미8군 무대에서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유명세를 떨쳤다. 또한 자녀들은 김트리오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연안 부두>를 불러 히트시켰다. 1979년에 발표한 <연안 부두>는 응원가로도 많이 쓰이며 오늘날까지도 많이 불리는 국민 가요이다.
글 출처 : 위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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