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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심(1912년 ~ 2001년)
본명은 황금동(黃金童)이다. 1934년 〈외로운 가로등〉으로 데뷔한 이후 1935년 15세 때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선발 모집에서 1등으로 입상하여 〈왜 못 오시나요〉·〈지는 석양 어이 하리오〉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작사가 이부풍의 소개로 빅타레코드로 옮긴 뒤 1938년 발표한 〈알뜰한 당신〉과 〈한양은 천리원정〉 등이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인기가수가 되었다. 〈알뜰한 당신〉은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남자에 대한 여자의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노랫말이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그는 김승호·허장강·배삼룡·최남현 등과 함께 '조선악극단'과 '백조악극단' 등을 통해 광복 전후 가장 인기 있던 공연 장르인 악극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0년대 말부터 일본·만주·사할린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18세 때 결혼한 남편 고복수와 함께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일본 등지로 공연을 다녔는데, 두 사람은 결혼 직후부터 스타 커플로 큰 화제를 뿌렸다. 한국전쟁 중에는 고복수가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시련 속에 1952년 취입한 〈삼다도 소식〉이 크게 히트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초 고복수의 히트곡 〈타향살이〉를 영화로 만들었다가 개봉 닷새 만에 4·19혁명이 터져 빚에 허덕이기도 했다.

그는 1970년대까지 〈울산 아가씨〉·〈뽕 따러 가세〉·〈사람팔자 몰라요〉·〈한양낭군〉·〈장희빈〉·〈양산도 맘보〉 등 4,000여 곡을 발표하며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는데, 젊은 시절에는 극장무대에서 마이크를 쓰지 않고 육성을 고집했을 만큼 목소리가 뛰어나서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녔다. 또한 민요조의 구성진 창법으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으나 1997년 사업에 실패하며 파킨슨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하였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글 출처 : 다음백과사전
남일연(1919∼ ?)
남일연 가수... 불멸의명가수에적힌글 남일연은 1919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1937년 가을 태평레코드에서 울금향이라는 예명으로 박영호 작사 이용준 작곡의 <눈물의 경부선>, <홍등은 탄식한다>로 데뷔하였다.

남일연의 경우도 불과 18세에 가수로 데뷔합니다. 그녀가 태어난 해는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으로 충남 논산이 고향입니다. 하지만 남일연의 학력과 가정환경,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밝혀진 자료가 전혀 없습니다.

아마도 시골에서 소학교 정도는 마쳤을 듯하고,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농촌을 순회하던 악극단 공연에 심취하여 넋을 놓고 뒤쫓아 다니던 철부지 소녀였을 듯합니다. 어떤 경로로 가요계와 구체적인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남일연은 1937년 가을 태평 레코드사에서 첫 음반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 작품은 ‘눈물의 경부선’(박영호 작사, 이용준 작곡)과 ‘홍등은 탄식한다’(처녀림 작사, 남지춘 작곡) 등 2곡으로 같은 SP음반에 수록되었습니다. 두 작품의 작사, 작곡을 맡은 사람이 표면적으로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표시하는 까닭은 대중들로 하여금 작품의 신선한 느낌을 유지시키게 하려는 음반제작자의 계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 태평 레코드사에서 악사로 활동했던 한 노인은 가수 남일연의 성격과 용모를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말수도 적은 데다 몹시 착하고 순진한 성격, 항상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레코드사를 드나들던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일연이 태평 레코드사를 통해 가수로 처음 데뷔하던 시절, 예명은 울금향(鬱金香)입니다. 그 회사의 문예부장으로 많은 가요시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던 극작가 박영호가 이 예명을 붙여주었지요. 울금향은 튤립 꽃을 가리키는 중국식 한자말입니다. 남일연이 발표한 두 작품의 반응이 예상외로 좋아서 가수는 울금향이란 예명으로 태평 레코드사에서 ‘간데쪽쪽’‘거리의 정조’‘풍년일세’‘만경창파’‘이별의 바다로’ 등 5곡을 더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무렵 회사의 경영수지는 극도로 악화되어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탓으로 남일연은 박향림 등과 함께 콜럼비아 레코드사로 소속사를 옮겨갑니다.

콜럼비아에서 남일연으로 재출발한 그녀의 제1작은 1938년 2월 신보에서 박영호 작사 김기현 작곡의 <마지막혈시>이다. 이어 3월신보에서 <흘겨본 타국땅> 4월신보에서 김해송과의 듀엣곡 <청춘 삘딩>, <뱃사공이 좋아>가 발매되어 이들 4곡은 "명화 남일연 무적반"이라 선전되었다 이어 그해 5월 신보에서 김해송과의 듀엣곡 <풋김치 가정>, <지배인 될수 알구>, 6월신보에서 <항구의 십오야>, <남자는 듣지마오>, 7월 특별발매로 <비오는 나진항>, 8월 신보에서는 박향림 신희춘과의 트리오로 <타국의 여인숙>, <바람은 열폭치마> 와 <야루강 처녀> 를 내었다. 야루강 처녀는 "조선일보 당선가"라고 되어있다.

남일연은 이어 <정든님 상서>, <춘자의 고백>등을 내었는데 그해가을 그녀는 다시 태평에서 취입하였다. 이때 콜럼비아 전속 인기가수 몇몇이 태평으로 옮겨갔는데 1938년 11월 태평의 "혁신 호화진영"이라는 광고로 보면 채규엽-박향림-남일연-송기옥의 이름이 실려있다. 이어 12월5일자의 "호화 태평의 花形陣"이라는 광고에서는 채규엽-박정림-울금향-송기옥-미쓰코리아 등 가수이름이 나와있으며 "우리들의 제1회 선물을 기대려 주기바란다" 라고썼다.

결국 그녀는 콜럼비아에 남게되었다. 1939년 들어서 <연분홍 장미>, <청실 홍실>, <낙화 유정>, <무정한 님> 등을 낸다음 4월 임시 발매로 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내었다. 그해 이어 <사랑도 팔자라오>, 강남주와 듀엣곡 <애수에 여로>등을 낸 남일연은 이듬해인 1940년 2월 신보에서 <청루 일기> 2월에 남해림 작사 이용준 작곡 <비오는 부두>를 히트시켰고 이어 <홍도의 고백>, <짝사랑 십년>, <이별의 소야곡>, <넋두리 순정>, <너없는 세상은>, <야속도 해요><망부석>등을 내었다.
글 출처 : Web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가수-선우일선(1919 ~ 1990)
기생을 다른 말로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는 것을 아십니까?
말귀를 잘 알아듣는 꽃이란 뜻입니다. 이 해어화들은 조선의 전통 궁중가무 개척자들이요, 선구자였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역에는 권번이 개설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평양권번의 명성은 드높았습니다.

기생출신 가수 선우일선(鮮于一扇)도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 출신입니다. 최창선이란 본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1919년 평남 대동군 룡성면에서 태어난 선우일선은 온화한 성격에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윤기가 자르르 느껴지는 목소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마치 옥을 굴리는 듯 고운 선우일선의 어여쁜 성음에 반한 남정네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우일선 데뷔직후 지금은 누렇게 변색된 당시 가사지(歌詞紙)와 유성기음반의 상표를 통해 선우일선의 생김새를 짚어봅니다. 얼굴은 동그스름한 계란형에 머리는 쪽을 쪄서 한쪽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군요. 눈썹은 제법 숱이 많고 검습니다. 그 밑으로 가장자리가 아래로 드리운 눈매는 선량한 성격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눈은 방긋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마치 봄비에 젖은 복사꽃잎처럼 말입니다.

아담하게 얼굴의 중간에 자리 잡은 코는 얼굴 전체의 윤곽에서 안정과 중심을 유지하면서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인중은 다소 짧아 보이는데, 그 입술의 선은 얼마나 어여쁜지 모릅니다. 아래위 입술은 부드럽게 다물려 있습니다만 그것이 결연한 함구(緘口)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전반적으로 은은한 느낌을 주는 선우일선의 용모는 보면 볼수록 가슴 설레고 서늘해집니다. 하얀 깃 동정을 곱게 달아 여민 목선이 아름답고, 저고리는 부드러운 흑공단으로 지은 듯합니다.

독일 계열의 레코드사였던 포리도루는 1931년 서울에 영업소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1932년 9월부터 조선의 음반을 만들게 됩니다. 당연히 한국인 가수가 필요했지요. <황성옛터>의 노랫말을 지은 왕평(王平, 1908∼1941)과 여배우 이경설(李景雪)이 문예부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포리도루에서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가수를 모집했습니다. 평양기생 출신의 선우일선도 이 무렵 발탁이 된 것입니다. 선우일선은 1934년 포리도루레코드사를 통해 가수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이때 데뷔곡은 시인 김안서(金岸曙, 1896∼?) 선생의 시작품에 작곡가 이면상(李冕相, 1908∼1989)이 곡을 붙인 <꽃을 잡고>였습니다. 국악기 반주에 맞추어 높은 톤으로 엮어가는 선우일선의 이 노래는 이제 신민요의 고전으로 기록될 만한 작품이란 평판을 받습니다.

작사가이자 뮤지컬 작가였던 이부풍(李扶風, 1914∼1982)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선우일선의 목소리는 “마치 하늘나라에서 옥퉁소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녀의 아름답고 청아한 음색은 신민요라는 경지를 한층 더 밝혀주었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 발간된 자료 『계몽기 가요선곡집』(2001)에 의하면 왕수복의 부드럽고도 독특한 가창력을 “설레이는 바다”에 견줄 수 있다면 선우일선의 가창력을 “노을 비낀 호수”로 비견하고 있습니다. 은은한 울림이나 아련함이 설레는 음색을 이렇게 표현한 듯합니다. 노래의 형상이 은근하면서도 운치가 있고, 마치 비단결처럼 부드러우며 아름답다고 해서 생겨난 비유적 표현이지요.

선우일선은 줄곧 서도민요의 구성지고도 애수에 젖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신민요 창법으로 불렀는데, 이 때문에 포리도루레코드사는 왕수복(王壽福)을 포함하여 세간에서 ‘민요의 왕국’이란 평을 들었습니다. 당시 취입한 대표적인 신민요곡으로는 <숲 사이 물방아>, <원포귀범>, <영춘부>, <원앙가>, <느리게 타령>, <청춘도 저요>, <지경 다지는 노래>, <가을의 황혼>, <별한>, <압록강 뱃노래>, <남포의 추억>, <무정세월>, <그리운 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우일선의 노래를 단연 대표하는 노래로는 그녀의 출세작이기도 했던 <조선팔경가(朝鮮八景歌)>(1936.1)일 것입니다.

<조선팔경가>(편월 작시, 형석기 작곡)는 2박자의 밝고 씩씩한 곡으로 신민요의 고전에 해당되는 명작입니다. 이 작품의 창작 모티브는 석굴암의 아침 경관이 보여주는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작사가 편월(片月)은 왕평 이응호의 또 다른 예명입니다.

<조선팔경가>를 창작한 작곡가 형석기(邢奭基, 1911∼1994)는 1911년에 태어나 20대초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해방 후에는 민요편곡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 노래는 1939년 <조선팔경가>란 제목으로 바꾸어서 재발매했는데, 첫 발표 후 3년이 지난 세월에도 여전히 대중들의 크나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었던 식민지시대에 내 나라 내 땅의 아름다움과 그 민족적 긍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노래를 만들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찡했겠습니까. 당시 식민지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이는 기회가 있을 적마다 이 <조선팔경가>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목이 메도록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해방 후 북한에서도 이 노래는 계속 불러졌는데, 이 사실은 참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팔경가>란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되 여덟 군데의 명소를 모조리 북한지역으로만 개사해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 남한의 것과 다릅니다. 한편 이 노래는 남한에서도 본래의 제목 <조선팔경가>를 <대한팔경가>로 바뀐 모습으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조선’이란 북한의 국명이 불편했던 것이지요. 남북한이 다 같이 함께 부르는 곡조지만 분단의 독소는 이렇게 노래에까지 스며들어 제목과 가사를 남북한 버전으로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신민요풍의 가수 선우일선의 노래는 하나같이 중심과 터전을 잃어버린 당시 식민지민중의 서러움과 슬픔, 청춘의 탄식, 고달픔, 삶의 애환 따위를 너무도 애처롭고도 유장한 가락으로 실실이 풀어갑니다. 선우일선의 음색에는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제 풀에 말라버린 눈물자국이 느껴집니다.

선우일선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때 고향인 평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에겐 특별히 사상이나 이념이 따로 있을 리 없었고, 다만 고향의 가족과 친척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선우일선은 해방 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으며, 평양음악무용대학 전신인 평양음악대학 성악과에서 교편을 잡고 민족성악 전공으로 연구와 후진양성에 노력하면서 민요에 관심을 가진 후학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은퇴 후에도 민요발전을 위한 노력에 힘을 쏟던 선우일선은 1990년 곡절도 많았던 이승을 조용히 하직했습니다.


글 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글쓴이 :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 가요해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