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봉(1920년 ~ 2001년)
돈궤 훔쳐 上京 가수 꿈 이뤄…서민애환 달랜 200여곡 '대중가수 1세대' 초창기 가수들의 소년시절 이력을 두루 살펴보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가슴 속에서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예술적 욕망과 그것을 전혀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냉혹한 환경 사이의 갈등과 괴리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식민통치하였던 1930년대 당시 부모들은 자신의 귀한 자녀가 판검사나 면서기가 되겠다면 적극 도와주었지만 만약 화가나 시인, 혹은 가수가 되겠다고 하면 크게 놀라며 만사를 젖혀두고 뜯어말리던 분위기였지요. 특히 가수지망에 대해서는 몹시 흉하게 생각하며 인간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풍각쟁이로 규정하던 관행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런 몰이해와 악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꿋꿋하게 관철시키며 대중예술의 길을 걸어간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입니다. 고복수와 남인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려는 가수 고운봉(1920∼2001)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였습니다. 1920년 2월9일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고운봉은 본명이 고명득입니다. 대중가요 작사가 고명기의 아우였지요. 1937년, 그러니까 나이 17세 되던 해에 예산농업학교를 마치고 고명득은 아버지의 돈궤에서 얼마간의 돈을 훔쳐내어 서울로 무작정 달아났던 것입니다. 상경 이유는 오로지 유명한 가수로 성공을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서울로 온 고명득은 당시 자신이 좋아하던 강석연, 채규엽, 이난영, 이은파, 최남용 등 일급가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던 태평레코드를 찾아왔지요. 그 무렵 태평레코드를 지휘하던 분은 극작가이자 작사가로 활동하던 문예부장 박영호 선생이었습니다. 박 선생은 마침 한반도의 북부지역과 만주 일대로 악극단 공연을 떠나기 위해 몹시 바쁜 시간이었지만 작곡가 이재호와 함께 고명득의 노래실력을 테스트해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재능 있는 가수를 발굴해내는 탁월한 안목과 식견을 갖춘지라, 곧바로 고명득을 태평의 전속가수로 채용하고 '운봉'이라는 예명을 주었습니다. 그리곤 잠시도 쉴 틈이 없이 무려 3개월 동안의 악극단 순회공연에 참가하도록 했습니다. 그토록 가수가 되고 싶었던 고명득에게는 실로 꿈같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태평레코드 전속가수의 신분으로 취입을 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지요. 드디어 1939년 여름, 고운봉은 자신의 첫 데뷔곡을 발표했는데 곡명은 '국경의 부두'(유도순 작사, 전기현 작곡, 태평 8640)였습니다. 이 노래를 작사한 유도순 선생은 이미 시인으로 데뷔하여 시집 '혈흔의 묵화'를 발간한 경력을 가졌지요. 작곡가 전기현 선생의 품격 높은 솜씨도 정평이 높았습니다. 여기에다 고운봉의 잔잔한 애수가 느껴지는 창법으로 압록강 국경 지역의 처연한 분위기를 노래했으니 대중들의 가슴이 설레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압록강, 농암포, 자후창, 신의주, 유초도, 진강산 따위의 지명을 떠올리며 우리의 잃어버린 고향, 눈물에 젖은 국토를 은근히 암시했던 것이지요. 뒷면에 실린 '아들의 하소'도 고향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나타낸 애잔한 작품입니다. 당시 태평레코드 작품의 광고지에는 고운봉을 '순정가수'로 소개했습니다. 그만큼 맑고 청아하며 애수에 젖은 창법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지요. 고운봉은 이 두 곡으로 단번에 인기가수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연이어 1940년 초반까지 두루 발표한 곡들은 '홍루야곡' '남월항로' '님 찾는 발길' '남강의 추억' '달뜨는 고향' '고향생각은 병이더냐' '흐르는 트로이카' '한없는 대륙길' '안해야 울지 마라' 등입니다. 이 가운데서는 '남강의 추억'(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 태평 8662)이 빅 히트곡입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항상 오케레코드사에 뒤지기만 했던 태평은 마침내 라이벌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사자 무적인은 작곡가 이재호의 또 다른 예명입니다. 항상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거느려야만 직성이 풀렸던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1940년 가을, 고운봉을 오케로 스카우트했습니다. 그리고는 '홍등일기' '밤차의 실은 몸' '모래성 탄식' '결혼감사장' '할빈서 온 소식' '선창' '백마야 가자' '일월이 걸어간 뒤' '광명을 찾어' 등을 발표시켰는데, 탁월한 대중프로모터의 자질을 지녔던 이철 사장의 선택은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1941년 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힘겹게 발표한 노래 '선창'(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오케 31055)은 공전의 히트곡으로 떠올랐습니다. 행인들이 유행가 '선창'의 곡조를 흥얼거리며 다니는 풍경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엔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데로 갔나 찬비만 나린다 유성기 위에 SP음반을 올리고 오랜만에 듣는 유행가 '선창'은 험한 세월을 힘겹게 통과해 오느라 서걱거리는 잡음이 절반입니다. 하지만 그 서걱거림 속에서 들려오는 고운봉의 슬픔을 머금은 창법과 쓸쓸한 여운은 가슴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우리들 젊은 날의 미련과 후회를 한 바탕 대책 없이 휘저어 놓고야맙니다. 지난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과 이상을 가졌고, 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까? 이제 그 살뜰한 젊음의 추억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식민지 시절, 학생과 지식인층 사이에서 이 노래는 그렇게도 많이 애창이 되었다고 합니다. 노래 가사도 훌륭하고 작곡도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가수의 창법 또한 최상의 수준에 이르렀으니 그야말로 작사, 작곡, 노래의 세 박자가 완전히 일치를 이룬 절창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지요. 이런 본보기는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분단 이후 작사자와 작곡가가 월북, 혹은 납북돼 작사, 작곡이 다른 분으로 슬그머니 바뀐 괴기적 사례 중의 하나였습니다. 고운봉은 1942년에 다시 콜럼비아레코드로 소속을 옮깁니다. 이후 '통군정의 노래' '황포강 뱃길' 등을 비롯하여 대여섯 곡을 발표하지만 이 가운데는 친일적 성향의 작품들이 더러 포함되기도 했습니다.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고운봉은 특이하게도 10여 년 동안 재즈와 록, 칼립소풍의 미국 대중음악에 심취하여 연습을 하다가 1958년에 돌아옵니다. 1950년대 후반 고운봉은 또 한 곡의 히트곡을 발표하게 되는데 '명동블루스'(이철수 작사, 나음파 작곡)가 바로 그것입니다. '명동블루스'는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명동,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새로운 삶의 의지를 불태워가던 당시 지식인들의 내면풍경을 실감나게 다룬 명곡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어 가수 고운봉은 흘러간 옛 노래를 자신의 스타일로 리바이벌한 음반을 발표하여 가요팬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2000년에는 충남 예산의 덕산온천에 '선창'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고운봉은 이날 '선창'을 눈물로 열창했습니다. 짙은 우수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깔끔하고 점잖은 창법, 적절한 울림으로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는 평을 받았으며, 일생을 통해 200여곡의 작품을 발표했던 가수 고운봉. 그는 2001년 여름에 영영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글 출처 : 아름다운 순간(이동순 - 시인, 영남대 국문과 교수)
진방남(1917∼2012)
모친별세 전보에 '불효자는 웁니다' 절창 옹골찬 음색에 가사 전달력 탁월한 가수로 한 시대 풍미 '반야월'이란 이름으로 '소양강처녀' 등 5천여편 작사도 가수 진방남(秦芳男)은 191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박창오(朴昌吾)이며, 작사가 반야월(半夜月)과 같은 사람입니다. 일제강점기 후반에 가수로 데뷔해 활동하다가 광복 후에 작사가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요. 그가 가수로서 발표한 대표곡으로는 '꽃마차' '불효자는 웁니다' '마상일기' '그네줄 상처' '잘 있거라 항구야' '사막의 애상곡' '눈 오는 백무선' '키타줄 하소' '오동닙 맹서' '북지행 삼등실' '고향 만리 사랑 만리' '세세년년' '넋두리 이십년' '비 내리는 삼랑진' 등이 있습니다. 흔히 가요사의 평자들은 진방남의 창법을 '꽁꽁 다져진 듯 옹골차고 매력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빈틈이 없는 특이한 음색'이라 해설했는데, 특히 노래 가사의 의미를 잘 해석하고 새겨서 표현하는 가수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진방남이 불렀던 노래의 제목과 가사를 살펴보면 대개 유랑민의 서러운 심정, 가족이산, 성공에 대한 다짐, 향수와 탄식 등으로 넘실거립니다. 주로 식민지 시대 삶의 애환을 다룬 것이 대부분이지요. 식민지 시대의 모든 가수들의 생애가 그렇듯 진방남도 고난의 청년기를 보낸 듯합니다. 철물점 직원, 고물상 잡부, 양복점 점원 등의 경력을 거쳤으니까요. 1939년 김천에서는 태평레코드사에서 주최한 전국신인남녀 가요콩쿠르대회가 열렸습니다. 북쪽은 함경도의 부령 청진, 동쪽은 일본의 오사카까지 각지에서 수백 명 청년남녀들이 운집한 가운데 나흘간 열렸던 대단한 행사였던가 봅니다. 이 대회에 출전한 진방남은 당당 1등으로 입상했고,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작사가 박영호(필명 처녀림) 선생이 문예부장으로 있었던 태평레코드사에는 채규엽, 선우일선, 신카나리아, 백년설, 최남용, 백난아, 태성호, 남춘역 등의 대표가수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진방남의 합세로 태평의 위용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작사가로는 박영호·조경환(고려성)·김영일(불사조), 작곡가로는 전수린·김교성·이재호 등이 이들의 노래에 날개를 달아주었지요. 진방남은 일본으로 가서 이 '불효자는 웁니다'의 취입을 앞두고 대기하던 시간에 '모친별세'란 전보를 받게 됩니다. 솟구쳐 오르는 통곡을 삼키며 몇 차례 노래를 불렀으나 목이 메어 실패하고, 결국 다음날로 연기한 끝에 울음 섞인 절창으로 녹음을 마치게 됩니다. 녹음실에서 가수는 일본으로 떠나던 아들을 배웅하러 마산역까지 나오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비오는 날 '고쿠라' 양복을 입고 우산에 가방 하나 달랑 들고 3등 차표 손에 쥔 아들을 향해 연약한 손을 흔드시던 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말입니다. 가수는 녹음을 마친 뒤 마침내 터져 나오는 통곡을 걷잡을 수 없어서 온몸으로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 노래의 원래 가사는 3절에서 '청산의 진흙으로 변하신 어머니여'였는데, 이를 진방남은 '이국의 우는 자식 내 몰라라 가셨나요'로 고쳐서 취입했습니다. 하지만 2절 가사에서 모순이 발견되었지요. '드디어 이 세상을'이란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드디어'라고 하면 마치 어머님이 빨리 세상을 떠나기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수는 취입 이후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드디어' 대신에 '어이해' 혹은 '한 많은'으로 바꾸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이 노래는 1975년 조총련계 교포 추석성묘단 환영공연장에서 희극배우 김희갑이 불러 장내를 온통 눈물바다로 만들었다고 하지요. 험한 시절을 살아온 모든 한국인들에게 가요곡 '불효자는 웁니다'는 자신의 삶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인지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대중들의 가슴 속에서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수로서 약 400곡을 취입했고, 작사가로서는 5천편가량을 발표했던 진방남(반야월)은 지금도 한 분의 원로 대중예술인으로 정정하게 자리하면서 흘러간 문화사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송달협(1919 ~ 1943?)
미남 가수로 레코드보다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송달협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36년 오케레코드에 입사하여 1937년 3월 신보에 [야루강 천리][끝없는 향수]로 데뷔 [야루강 천리]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어 그해4월 신보에서는 [국경의 버들밭] 5월신보에서 [노 타이 시인] 6월 신보에서 [순정의 달밤] 그리고 [산유화]등을 내었다. 1938년 정월신보에서 [포도의 기사] 3월신보에서 [저달이 지면은] 4월신보에서 [왜 말이없소] 와 장세정과의 듀엣곡 [젊은날의 꿈] 5월신보에서 [국경열차] 7월신보에서 [못생긴 영웅] 8월신보에서 [ㅇ노의 탄식] 9월신보에서 [오 정신아] 10월신보에서 [눈물의 꿈길]등을 내었다. 이무렵 빅타레코드로 옮겨간것 같으며 그해 오케 11월 신보로 발매된 [국경의 뱃사공]은 신문 광고에 실리지 않았다. 1939년 빅타에서 재출발한 송달협은 2월신보에서 [야멸찬 심사] 4월 신보에서 [외로운 남아] 5월신보에서 [청춘기록] 6월신보에서 그의 또하나의 대표곡 [추억에 두만강]을 내었다 이어 8월신보에서 [향수마차] 9월신보에서 [비오는 이국항] 12월신보에서 [여로의 조각달] 등을 내었다. 1940년 4월신보에서 [순정의길]을 낸 송달협은 그후 다시 오케로입사 1941년에 [창공] 1942년에 [만주사랑]등을 내었다. 해방후 송달협은 악극무대에서 활약하였다 환도후인 1955년 2월 20일부터 국립극장공연을 시작으로 하여 3월 17일부터의 계림극장 공연에 이르기까지 대구.부산.서울의 네 게극장에서 공연한 악극단 "호화선.태평양" 합동공연 광고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해 10월 7일부터 12일까지 중앙극장에서의 "태평양 악극단"공연을 끝으로 그의 이름이 사라졌다 그는 이무렵 타계한 모양이다. 송달협은 하이톤의 섬세한 여성적인 목소리로 인기를 끌었으며 해방후에는 [꿈에본 내고향]을 무대에서 즐겨불러 이 노래를 보급시켰다.
글 출처 : 다음카페 '음악 그리고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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