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oading...
  • Loading...
김용환(1912년 ~ 1948년)
그는 김정구의 친형이 김용환이고 1930년대 초부터 노래와 작곡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교회음악에 심취하였고, 22세 때 순회공연중이던 연극단 금성좌(金星座)에 입단하여 무대가수로 활약하였습니다. 그 뒤 「숨쉬는 부두」·「낙동강」을 불러 인기가수로 성장하였지요. 노래를 부르는 한편, 신민요풍의 노래를 많이 작곡하여, 본인이 부르거나 다른 가수들이 부르게 하여 발표하였습니다.

1935년 삼천리지에서 실시한 가수 인기투표 남자 부문에서 채규엽에 이어 2위로 입선한 김용환은 그의 여동생 김안라(金安羅), 남동생 김정현, 김정구 그의 아내 정재덕이 가수로서 널리 알려졌고 특히 김정구는 오랜 세월 정겹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주어 문화 훈장을 받는등 국민가수로서 사랑을 받았습니다.

1909년에 함경남도 원산에서 테어난 김용환은 두만강 뱃사공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한 이래 1949년 세상을 뜰때까지 짦은 일생을 사시는 동안 구십리 고개, 노다지 타령, 모던 관상쟁이, 낙화유수 호텔, 이꼴 저꼴, 장모님전 항의, 가거라 초립동 등 아주가리 선창등 수많은 곡을 남겼습니다.

김영파, 조자룡등의 예명으로도 발표된 김용환 작곡 노래는 거의 대부분 선율이 우리 민족의 토속성을 담고 있습니다. 숨쉬는 부두 (작사 김성집, 작곡 김양촌)로 데뷔한 김용환의 노래는 우리들의 귀에 익은 동생 김정구와 비슷한 성량과 목소리를 지녔습니다. 1930년대 초부터 젊은이의 봄, 춘몽, 낙화유수 호텔, 눈깔먼 노다지, 꼴망태 등 스스로 작곡한 노래를 비롯해서 수많은 정겨운 노래를 불렸습니다.


글 출처 : 다음카페 '음악 그리고 추억'
김영춘(1918∼2006)
1936년에 악극단 <청춘좌>는 무명 작가인 임선규씨가 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동양극장에서 초연하여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일찍 부모를 잃은 두 남매가 서로 의지하고 살았는데, 동생 홍도는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됩니다.

오빠 친구인 부잣집 아들 광호는 부모의 반대 속에서도 약혼녀와 파혼하고 홍도와 결혼하지만, 홍도는 남편이 유학을 떠나자 시댁에서 쫓겨납니다.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조차 홍도가 부정한 여자라는 집안 식구들의 모함만 듣고 예전의 약혼녀와 다시 결혼하려고 합니다. 이에 이성을 잃은 홍도가 과도로 약혼녀를 살해하고 순사가 된 오빠에게 수갑을 채이고 잡혀가게 된다는 기구한 운명이 줄거리입니다.

전형적인 여성 수난극이자 한국형 '최루(催淚)극'의 원조인 이 악극이 악극 사상 최장기 공연을 기록했는데,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고, 홍도와 자신들을 동일시 한 장안의 기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함께 눈물바다를 이뤘으며, 어느 기생은 한강에 투신자살을 했는가 하면, 기생들을 구경하려고 극장을 찾은 한량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한성은 물론이고 지방 공연까지 연일 만원일 만큼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자 이듬해인 37년에 같은 이름/내용의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그 주제가는 심연옥씨가 부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으며 (가사: 거리에 핀 꽃이라 푸대접 마오. 마음은 푸른 하늘 흰구름 같소…..), 김영춘 선생님이 부른 이 《홍도야 우지 마라》는 삽입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제가보다 삽입곡의 가사인 “홍도야 우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는 노랫말이 열병처럼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져서 《홍도야 우지 마라》 레코드가 무려 10만 장 넘게 팔리는 대성공을 이루며 신파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힘든 일제 시대에 희망을 던져준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여러 번 영화와 드라마로 각색되곤 했는데, 94년에는 극단 <가교>가 악극으로 재현했습니다. 또 이 노래는 술 한 잔 걸친 남성들이 마치 교가나 군가처럼 목청껏 합창하는 애창곡이기도 합니다.

가수 김영춘 (본명: 김종재, 1918 ~ 2006) 선생님은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양복 재단 일을 배우던 1938년 스무 살 때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주최한 전국 가요 콩쿠르에 입상한 후 《항구의 처녀설》로 가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를 비롯한 40여 곡을 불렀지만, 《홍도야 우지 마라》의 인기가 너무 높았고 후속 히트 작이 없어서 다른 노래들은 상대적으로 가려져버렸습니다.

게다가 50년대에 박재홍 선생님이 이 노래를 리바이벌 해서 크게 히트하자, 처음 노래를 부른 김영춘 선생님의 성함조차 흐려지게 되었습니다. 쓸쓸한 노후를 보내시다가 2005년에 교통사고를 당하셨고 이듬해에 후유증으로 타계하셨지만, 선생님께서 남기신 이 노래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글 출처 : 다음카페 '음악 그리고 추억'
이규남(李圭南, 1910 ~ 1974)
충남 연기군 출생으로 본명은 윤건혁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정식으로 피아노를 공부하고 돌아온 엘리트였다. 1932년 경부터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33년 임헌익(林憲翼)이라는 이름으로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발표하여 가수로 데뷔했다. 초기에 취입한 노래는 신민요풍의 음악들이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활발한 가수 활동을 하면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일본에서는 미나미 쿠니오(南邦雄)라는 이름을 썼고, 임헌익 대신 이규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한 것은 1936년에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면서 부터이다. 빅타에서 활동할 때는 홍난파가 특별히 이규남을 아껴 다수의 곡을 작곡해주었다. 1941년 다시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이규남이 부른 총 140여 곡의 가요 중에는 대표작 〈진주라 천리 길〉(1941)이나 만요 분야의 히트작 〈장모님전 상서〉(1938) 등 인기곡도 적지 않았으나,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면서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동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특히 〈진주라 천리 길〉은 월북 작사가인 조명암이 작사하고 작곡 역시 월북 작곡가 이면상이 맡은 곡이라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이 노래는 〈사의 찬미〉처럼 요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선율로 시작되는 세련된 곡이다.

조명암은 8월북 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이면상은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까지 올라 북조선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음악인들이다. 이규남도 이들과 같이 북조선에서 순탄한 삶을 살면서 작곡과 무대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이규남이 활동하던 일제 강점기 말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군국가요가 널리 불리고 있었다. 이규남 역시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군사우편〉(1942)이나 〈승전가〉(1943)와 같은 노래를 발표하고 일본어 군국가요 〈열사의 맹서(일본어: 熱砂の誓い〉도 부르는 등 친일 가요를 보급하는 데 참여했다.〈군사우편〉은 병정되어 죽는 것이 소원이라 장렬히 전사한 뒤 부모에게 피묻은 적삼 하나만 보내겠다는 내용이며, 〈승전가〉는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가사로 되어 있다.[2] 이 가운데 〈군사우편〉은 〈진주라 천리 길〉의 조명암과 이면상 콤비가 만든 노래이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글 출처 : 다음카페 '음악 그리고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