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설(白年雪, 1915년 ~ 1980년 12월 6일)
본명은 이갑용(李甲龍), 이창민(李昌民)이다.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등을 연속 유행시켰다. 대표곡은 1940년 발표되어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린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이며, 이 밖에도 <삼각산 손님>, <고향 길 부모길>, <남포불 역사>, <눈물의 백년화>, <산팔자 물팔자>, <천리정처>,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곡이 많이 있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로 활동했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모은 남인수, 김정구, 진방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편이라면, 백년설은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게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친근한 맛을 주는 백년설의 창법은 서민적인 취향의 노래와 잘 어울려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했다. 1941년 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아들의 혈서>, <혈서지원>, <위문편지>, <지원병의 어머니>, <즐거운 상처>등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친일 가요를 다수 불렀다. 이 가운데 조명암이 작사한 <혈서지원>은 혈서를 쓰면서까지 지원병이 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며 후렴구에는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라는 가사를 담고 있어 군국가요 가운데서도 친일성이 농후하다. 백년설은 남인수, 박향림과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백년설이 일제 강점기 말기에 군국가요를 부른 것은, 전쟁 지원을 위한 총력 체제 하에서 인기 가수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설혹 문제가 된다 하더라도 그의 예술 인생과 공적을 함께 논해야 할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에 은퇴했다. 가수인 심연옥과 결혼한 뒤 1978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함께 이민을 갔으며, 2년 후인 1980년에 미국에서 사망했다. 고향 성주에 생가가 남아있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군민노래자랑 성격의 백년설가요제 추진이 백년설의 친일 경력으로 인해 몇차례 논란이 되기도 했다. ?
글 출처 : Web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