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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유행가 가수 등장 - 채규엽
<유행가 가수 탄생 >
한국에서 유행가 가수가 등장한 것은 70년전인 1930년 3월이었다. 1926년 윤심덕이 "사의 찬미가"를 부른 음반이 나왔었지만, 유행가 가수가 아닌 전문 성악인 이었고 곡 또한"푸른 다뉴브강의 물결" 이란 외국기악곡으로 윤심덕이 노래말을 만들어 레코드에 취입한 후 애인인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 푸른 바닷물에 정사한 것이 일대 화제 거리가 되어 "사의 찬미"가 대중화가 된 것이다.

1929년에 "낙화유수", "자라메라(종로네거리)" 2곡이 유행가로 등장하였지만 유행가 가수가 없는 시절이라 동요 노래를 공부한 이정숙이란 소녀가 불렀었다. 1920년 전후로 "학도가", "희망가" 등의 창가와 뒤이어 "푸른 하늘 쪽배엔.." 으로 시작되는 "반달" 동요가 나오면서 판소리나 타령등의 창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색적으로 서양음악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유랑극단에서는 연극주제가인 일본노래 "장한몽", "부활" 등의 노래가 무대 배우들이 불러 관객들로부터 신기한 느낌을 받으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1930년 1월 "종로행진곡", "그대 그립다" 유행가를 노래할 여자를 물색 중 적당한 인물이 없어 여자 배우 복혜숙이 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 노래를 잘 한다는 이애리수 소녀를 찾았으나 이애리수는 취성좌라는 연극 단체에서 소녀배우로 전국 순회공연 중 이었다.


1933.1.12 동아일보 : 콜럼비아 레코드 채규엽 음반광고

<유행가 가수 1호 채규엽>
1930년 서울에서는 콜럼비아레코드 서울지사 설립을 축하하는 자축연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여흥 좌석에는 일본어로 "나니와 부시(浪花節)"를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30년 3월에 일류변사 김영환이 김서정이란 예명으로 만든 "봄노래 부르자", 채규엽 자신이 직접 만든 "유랑인의 노래"를 발표하였다.

1932년에는 일본 동경에서 콜럼비아레코드 본사에서 전속 가수체결을 하고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32년에 부른 노래를 찾아보면 "대동강", "도라지타령", "타는 이마음", "가는 청춘", "님 자취를 찾아서", "가을밤", "조선의 노래", "일하러 가세", "수선화", "흰 돛대 간다", "지난 꿈" 등으로 1개월에 2곡 정도가 발표되었다.

당시의 레코드는 1개월에 10장 내외로 정기적으로 음반을 발매하였는데, 판소리, 동요, 민요, 영화해설, 넌센스 유행가 등의 장르별로는 1~2장 밖에 될 수가 없었다. 유성기 음반 한장에 앞뒷면을 합쳐서 2곡이 되는 셈이다.

<가수 채규엽의 행로>
채규엽은 1907년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원산 중학교 시절에 서양음악을 접하고부터 음악에 대단한 관심을 가져왔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전(神田)음악학원에서 1년간 성악기초를 닦고 1928년 귀국하여 YMCA에서 독창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의 피아노 연주 일인자인 김영환이 반주를 하였다.

1922년 서양음악 독창회를 윤심덕이 처음으로 개최한 이후 1928년 2번째 독창회를 개최한 몇 사람중의 하나가 채규엽이었다. 그 해에 일본에는 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 동경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음악부 위원으로 피선되기도 하였다. 1930년 3월 안국동에 있던 근화여자 학교에 음악부가 신설되어 성악교사로 학생들을 지도하던 중 콜럼비아레코드 경성지사 설립 자축연에 참석한 것이 성악가 채규엽의 인생행로를 유행가 가수로 바꾸어 버렸다.

1932년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郎)라는 예명으로 일본 동경에서 일본 제1의 여가수 "아야와 노리고"와 함께 "아리랑의 노래", "방랑의 노래"를 일본어로 부른 일본 유성기 음반을 발표하였다. 가요사에서 최초로 일본에 진출한 가수로 볼 수가 있다.

채규엽이 무대에 등장할 때에는 꼭 연미복을 입었었는데 예술 가곡이나 대중가요의 구분이 확실치 않았던 시절의 한 풍경이다.

1931년에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채규엽은 2년간 일본 중앙 음악학교에서 성악공부를 하였는데, 초기의 음악인 이영세, 안보승이 중앙음악학교에서 기악을 전공하고 , 이승학(서라벌 예술대학 초대 학장역임),이면상(평양음대 초대 총장 1960년대)이 성악과 작곡 공부를 하던 동기생들이다.

<염문과 사건의 인물>
유행가 가수가 되고부터 채규엽의 주변은 수 많은 염문과 사건으로 얼룩져 있다.
일본을 오가면서 그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정착된 가정을 가진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34년 동경에 있는 28세의 여인이 채규엽을 결혼 사기죄로 고소하여 피소되기도 하였고 1937년에는 대전의 일류 기생 한선월에게 3백원을 빌려서 못 갚자 사기죄로 고소당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이 돈으로 자칭 콜럼비아 악단을 조직, 무명가수들을 모집하여 흥행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단원들은 뿔뿔이 헤어져 버렸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악극단이 해체되고 여관에 남아있던 24살의 김춘방과 19세의 박길수라는 처녀가 도망쳐 나온 집을 갈 수도 없고 무일푼의 몸으로 실의에 빠져 음독 자살 하였다. 이 무렵의 가요계 판도는 남인수, 백년설 등 신진 가수가 등장하여 채규엽의 초기 명성은 뒤로 가리워지고 있었다.

포리돌레코드, 태평레코드에 노래를 하면서 일제 말기에는 친일 단체의 간부로서 비행기 헌납 모금운동에 앞장서고 일본을 왕래하다가 8.15해방을 맞아 친일파 처벌이 시작되자 자취를 감추다가 1947년 창경원(창경궁)에 열린 야외공연무대에 나타났다.

40세의 대머리로 변한 모습이라 이마에 숯검정칠을 하고 무대에 올라갔었다. 이듬해 악극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기도 하였으나 혼란기의 궁핍한 생활 속에서 흥행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부도수표로 또 한번 구속 당한 채규엽은 남인수, 백년설, 이난영, 김정구 등 일류가수가 총 출연하여 공연한 수입금으로 구출되었다. 그 이듬해에 채규엽은 떠나온 고향생각과 중앙 음악학교 동기생이 평양에서 많이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월북하였다. 6.25전쟁이후 피난온 사람들에 의하면 남쪽에 활동하던 방식이 북한의 거부반응으로 아오지탄광으로 끌려간 후 종적이 묘연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행가와 채규엽>
1933년 [삼천리] 잡지에 게재된 채규엽의 투고글을 요약하여 본다.

"유행가는 탄식한다. 연말은 청산의 시기이다. 내게도 1933년을 맞이할 청산이있다. 유행가나 부르는 내게 무슨 청산이 있겠느냐며 조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도 틀림없는 민요일 것이다. 우리가 음악사를 펴볼 때 현대음악의 권위를 잡고 있는 교향곡 취주악 등이 모두 민요의 형식이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유행가곡을 가지고 유일의 예술이라고 역설함은 아니다. 유행가곡에 대한 과거의 관념을 청산하고 새로운 신념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과거의 유행가곡에 대한 식자들의 관념은 이러하였다.[유행가라 함은 부패한 하류계급에나 부를 것이며 사회를 멸망에 이끌며 민심을 속악으로 끄는 해독만 주는 가치없는 것이다.

이것이 재래유식계급의 사설이며 구설이었다. 우리는 유행가를 매도하기 전 예리한 작곡가들이 작법에 변화를 주어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내가 중앙 음악학교 본과 삼학년에 편입한 것은 어떤 사람은 간판을 따기 위함이라지만 나는 의미 있는 유행가곡을 부르며 연구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악단의 선진 김영환, 독고선, 안기영, 현재명, 채동선, 최호영 제씨의 건강과 활동을 빌 뿐이다."
-{동경 객사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