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로드 치아리(Claude Ciari)
끌로드 치아리는 1944년 2월 11일, 남 프랑스 꼬뜨 다쥬르의 아름다운 관광도시 니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그는 지극히 평범한 소년으로, 그가 장차 기타 한 대로 전 세계에 그 명성을 떨칠 인물이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린 끌로드의 백부는 예외였다. 끌로드가 11살 되던 해에 백부가 사다 준 기타는 그가 갖게 된 최초의 악기였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 찾아온 첫 전환점이었다. 그 전과 후의 삶이 180도 달라지는. 어린 끌로드는 이때부터 하루 종일 기타와 함께 살았다. 끌로드가 기타를 다루는 솜씨는 백부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어서 하루가 다르게 숙달되어 갔다. 당시 끌로드의 백부는 자기 악단을 이끌고 교외에 주둔한 미군 기지를 순회하며 연주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끌로드는 나이 불과 13살 때 백부의 악단에 기타리스트로 정식 데뷔할 수 있었다. 아무리 백부의 악단이라지만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직업 음악가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역량을 짐작하게 한다. 학교 공부를 거의 포기하다시피하며 오로지 기타 음악의 완성을 위해 전심전력한 결과, 그의 재치 있는 연주 실력과 조숙한 음악성은 차차 음악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끌로드 치아리가 솔로이스트로 독립할 것을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19살 때인 1963년이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되었다. 젊은 기타 독주자 끌로드 치아리의 데뷔 곡은 ‘Husherbye'였다. 이어서 이듬 해 1964년, 끌로드 치아리는 불후의 명곡 ‘La Playa'를 발표하면서 그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La Playa'는 그리스의 바실리스 조르지아네스 감독이 발표한 영화’ 붉은 등‘(Red Lantern)의 주제가로, (’La Playa'는 ‘해변’이라는 의미이다.) 이 곡은 원래 네델란드의 ‘로스 마야스’라는 록 그룹의 멤버인 기타리스트 조 반 웨터가 1964년 작곡한 곡으로 영화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영화 수입사가 이 영화의 일본 개봉 때 끌로드 치아리의 연주를 사운드 트랙에 삽입하면서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영화 ‘붉은 등’이 개봉되면서 끌로드 치아리의 감미로우면서도 깊은 애수에 찬 기타 곡은 ‘안개 낀 밤의 데이트’라는 로맨틱한 제목으로 번안되어 사랑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곡은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바루가 가사를 써서 샹송이 되었고 마리 라포레가 불러서 히트하기도 했으나, 끌로드 치아리의 감미롭고 애수에 넘치는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을 떠나서 ‘La Playa'를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을까. 끌로드 치아리는 이 한 곡으로 150만 장의 디스크 판매를 기록하고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로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기라성 같은 재주꾼들이 많은 기타 음악계에서 그를 단연 독보적인 존재로 빛나게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편안한 느낌을 주면서도 흔히 들을 수 없는 독특하고 매끄러운 연주기법 때문이다. 그는 강렬하면서도 따듯한 음조, 한결 같은 리드미컬한 창의성, 그리고 자기만의 독특한 음악적 색깔을 중시하면서 기타 음악의 지평을 넓혀왔다. 돌이켜 보면 가벼운 다이내미즘과 열정에 찬 '첫 사랑의 항구'(Les Calaques de Piana) '사랑의 티화나‘(Ciari`s Tijuana)같은 초기 작품들도 좋았지만 `첫 발자국'(Le Premier Pas), '나부코의 기타'(Nabucco’s Guitar), '물 위의 암스테르담'(Amsterdam Sur Eau)등 성실한 인간성과 원숙한 기교에 뒷받침된 중년기의 작품에는 한층 그 깊이가 마음속에 사무쳐오는 것을 느낀다. 끌로드 치아리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 그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1967년 2월이었다. 일본 팬들의 환호는 대단했다. 이후 유럽에서 일본으로 그의 삶과 음악의 무대는 바뀐다. 그는 1976년 9월, 일본 여성과 결혼한 후 아예 일본에 정착했고, 마침내 1985년 5월 일본으로 귀화하여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끌로드 치아리는 일본에서 콘서트나 디너 쇼, CD나 드라마 음악의 제작, TV, 라디오, 영화출연과 강연 등을 통해 그의 연륜이 지닌 깊이와 무게만큼이나 다양하게 삶과 예술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다. 또한 그는 음악가인 동시에 컴퓨터의 권위자로 일본 컴퓨터 업계에서 높은 평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사실 그는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 전에 파리 증권 거래소 컴퓨터실의 엔지니어로 근무한 적이 있다. 본격적으로 음악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컴퓨터에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1981년 퍼스널 컴퓨터를 구입한 후 컴퓨터를 시용해 음악, 영상, 문자, 음성 등을 멀티미디어로 융합시키는 재미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음악이든 컴퓨터든 그의 태도는 한결 같다. 성공에 집착하지 않되, 무슨 일에나 쉽게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현재 끌로드 치아리는 일본 정보처리 기술자육성협회의 고문이라는 직함을 갖고 컴퓨터 메이커의 자문에 응하거나 국내외 컴퓨터 전문지에 기고하면서 좀 더 광범한 문화와의 교류를 창조하고 있다. 영화음악에서 클래식, 샹송. 칸초네, 라틴에 이르는 다문화적인 하모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엿보이는 다양한 선곡이 특징이다. 기타 연주를 매끄럽게 잘 하는 젊은 연주가들은 널려 있다. 그러나 끌로드 치아리의 진가는 마음에 와 닿는 심금을 울리는 연주에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 민요 ‘벵가완 솔로’(Bengawan Solo)를 비롯해서 불멸의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의 명곡 ‘당신이 날 사랑한 날’(El dia que me quieras), '베사메 무초‘(Besame Mucho)를 재해석해 기타로 감미롭게 연주해낸다. ’枯葉‘-고엽 (Les Feuilles mortes)이나 ’러브 스토리‘(Love Story) 같은 발라드 곡은 떨리는 듯 감칠 맛나며 저 유명한 스페니시 기타의 명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열정적이고 섬세한 주법을 번갈아 구사하면서도 지나친 기교의 과시에 으르지 않고 기타의 묘미를 한껏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아무리 구닥다리 음악이라고 해도 변덕스런 유행에 밀려나기는 정말 아까울 정도로 훌륭하다. 그리고 끌로드 치아리는 연주회장과 CD 플레이어 위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 서 남 준 (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