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는 방대한 작품과 그 내용의 깊이로 인해 20세기 러시아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인정받는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한 그는 졸업 작품인 <교향곡 제1번>으로 일약 소련의 천재 작곡가의 반열에 올랐다.
1927년 제1회 쇼팽 콩쿠르에서 2등상을 받아 뛰어난 피아니스트로도 인정받았다.
작곡가로서 그의 지휘를 확립시킨 것은 1934년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동시 초연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이었다.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의 공격은 거셌다.
'프라우다'지로부터 이 오페라에 대해 '음악이 아니라 진흙덩이'라는 비판과 함께 '부르조아의 센세이셔널리즘'이라는
공격을 받는 바람에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쇼스타코비치는 러시아의 국민 작곡가가 되었지만 악의에 찬 공격도 증가했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유럽의 새로운 경향의 음악, 즉 I.F.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베르크의 표현주의 작품들이 한창 연주되었으므로, 그도 그들의 작품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의 작품에 '제2교향곡' '제3교향곡' 그리고 '피아노, 트럼펫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 '피아노전주곡집'
고골에 의한 오페라 '코' 발레 '황금시대'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예술에서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가 34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멕베스부인'이 공산당의 예술운동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창작에 대한 이러한 간섭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으나, 그는 이 비판을 견디어 내고 작풍을 전환하여 37년의 '제5교향곡'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40년 '피아노5중주곡'으로 제1회 스탈린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방공감시원으로 종군하였고, 1942년 '제7교향곡'으로 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전 후인 1945년에 발표한 '제9교향곡'은 그 경묘한 내용과 신고전적 작풍 때문에 "타락한 유럽 부르주아지의
형식주의에의 추종"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즉 '지다노프 비판'이다.
그러나 49년의 오라토리오와 51년의 합창모음곡 '10인의 시'로 인기를 회복하고 또다시 스탈린상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여 1927년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1937~1941년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1943~1948년에는 모스크바음악원의 작곡교수를 지냈다.
작품에 15곡의 교향곡 외 현악 4중주곡을 비롯, 기악곡, 오페라, 오라토리오, 발레음악, 영화음악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1937년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초연된 <교향곡 제5번>으로 인해 인기를 회복한 그는 이 해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47개나 되는 그의 작품 중에는 거대한 규모와 주제를 가진 교향곡만도 15개나 되고<재즈 모음곡>(1934)같이
당시의 러시아로선 상상하기 힘든 곡도 있으며, <새 바빌론>과 같은 영화음악도 40여 개나 남기고 있다.
출처 : 아름답게 눈물이 날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