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과 교향곡 제4번>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9번에서 최고조를 이룬 이후 교향곡의 역사는 사실상 두 갈래의 길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를 비롯하여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에 의해 베토벤의 특징을 계승하면서
표제 교향곡(Program symphony),
교향시(Symphonic poem),
음악극(Music drama)으로 방향을 돌렸고, 다른 하나는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과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슈만에 의한 순수한 기악적인 교향곡이 예전의 형식으로 새로운 낭만적인 사고에 접근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낭만적인 서정의 아름다운 환상과 신선함 그리고 천재적인 낭만주의자만의 날카로움을 발휘한 슈만이었지만, 그의 교향곡은 의외로 취약점이 많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런 슈만은 4곡의 교향곡을 남기고 있으나, 사실 그리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향악이 지니는 웅장함이 결여되어 있고, 편곡에 있어서 다양함이 없고, 전체가 통주로 시종일관하는 등 화려한 데가 없는 곡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서신(書信)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가 출판하고 싶은 또 들려주고 싶은 것은 교향곡뿐입니다. 나는 가끔 피아노를 부셔버리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내 사상을 말하기에는 피아노는 너무 답답합니다.”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슈만은 자신의 사상이나 넘치는 예술적 영감을 나타내는데 있어 교향곡의 형식이 그다지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고 판단한 듯 싶다. 이것은 슈만의 음악적 영감이나 그에 따른 사상의 비약이 형식의 틀 속에서 해결될 수 없을 만큼 폭넓고 기형적이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결국 슈만이 남긴 4곡의 교향곡은 동시대 작곡가들이 남긴 교향곡과는 달리 형식의 안정감이 없고 빈약한 구성과 단절된 전대로 인한 형식의 불안감 그리고 선명하지 못한 색채감이 초래한 둔중한 관현악 기법으로 인해 그리 인상적인 것이 되고 있지 못하다. 이런 것을 반영이나 하듯 작곡가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슈만 교향곡 전4곡 모두를 그 스스로가 손질한 편곡판을 내놓은 바 있다.
슈만의 나이 31세인 1841년 2월에 완성된 교향곡 1번 〈봄〉은 멘델스존에 의해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슈만은 그의 두 번째 교향곡 작곡에 바로 착수한다. 이해 6월 그의 아내
클라라(Clara Schumann, 1819~1896)는 일기에
‘로베르트의 일하는 모습과 멀리서 격하게 들려오는 d단조 음으로 보아 그가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적고 있다. 이 곡이 바로 훗날 교향곡 4번이 되는데 당시는 2번 교향곡이었다.
또 슈만은 교향곡의 표제가 ‘클라라(Clara)’가 될 것이라고 했고 약 3개월간에 걸친 작업 끝에 9월 13일 클라라의 22번째 생일날에 완성하여 자신의 창작의 의욕이자 행복의 원천이었던 그녀에게 헌정한다. 또한 이날은 첫 딸이 태어난 지 13일이자 명명일(命名日)이어서 클라라의 기쁨은 더했다. 1년 전인 1840년 슈만은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와의 법정 다툼으로 어렵게 클라라와의 결혼을 쟁취했고 1년 뒤 첫 딸 마리(Marie Schumann, 1841~1929)를 얻는 등 행복에 휩싸여 있었다. 더불어 자신의 창작력이 가장 왕성했기에 정신착란으로 인한 무기력이나 혼란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그런 한 때였다.
그래서 이런 1841년을 ‘교향곡의 해’라 부르는데 1, 2번 이외에도 작은 교향곡이란 뜻의 ‘symphonette'라고 하는 〈서곡 스케르쪼와 피날레(Overture scherzo and finale)〉 Op.52가 작곡되어 1841년 2번 교향곡과 함께 초연 되었는데 1845년 개정되었다. 그리고 55마디만 쓴 c단조 교향곡이 시도된 해도 이때였다.
이렇게 이해에 교향곡에 관심을 쏟게 된 계기는 그가 1838년 빈을 방문하여 슈베르트 형(Ferdinand Schubert, 1794~1859)과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교향곡 9번을 발견하였고 이것을 멘델스존에게 초연하게 한 것이었는데 이것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향곡 작곡의 시작은 10대 때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교향 츠비카우에서 만든 2악장의 미완선 g단조 교향곡 일면〈Zwickau〉가 그 시작이었다.
교향곡의 4번 초고의 초연은 1841년 12월 다비드(Ferdinand David, 1810~1873, 독일)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orchester Leipzig)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1번과 달리 영 신통치가 못했다. 마침 그곳에 와 있던 리스트가 찬조 출연하여 그의 〈헥사메론(Hexameron)〉을 클라라와 2중주로 연주하였는데 청중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렸다. 또한 오케스트라 악장인 다비드의 시원치 않은 지휘, 곡 자체의 오케스트레이션의 미비, 참신한 곡이 구조로 인한 낯설음이 초연 참패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슈만은 출판을 보류하게 되었고 1846년 작곡한 C장조 교향곡인 Op.61이 제2번 교향곡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1851년 뒤셀도르프에서 주로 금관 파트를 개작하여 제4번 교향곡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개정판은 슈만 자신에 의해 1853년 5월 뒤셀도르프 라인 음악제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둔다. 또 당시 22세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Joseph Hoachim, 1831~1907)이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이런 초연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하지만 당시 슈만은 병세가 매우 악화되던 때로 얼마 후 1854년 41세의 나이에 자신의 몸을 라인강에 던지고 만다. 그리고 2년 후 쓸쓸히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한편 1853년 슈만에 의해 『신음악잡지(음악신보)』에 천재로 소개되는 브람스는 이런 개작으로 인해 원본이 가지고 있던 특징들이 사라졌다고 주자하며 초고의 악보를 1891년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두 개의 판본이 존재하나 현재는 대부분 개작판으로 연주한다.
이런 제4번 교향곡은 원래 ‘교향적 환상곡(Symphonic Fantasia)’이라는 표제가 있었고, 전체가 쉼이 없이 연주되는 통일성과 일말의 우수가 감도는 단조 조성은 교향곡 4곡 중 가장 특이하면서도 독창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슈만만이 가지는 넘치는 풍부한 시상과 낭만성은 결코 간과할 수는 없는 것이며, 결혼이 가져다 준 평온함이 전편에 활달하게 넘쳐흐른다. 구성면에서 고전파를 모방하고 있으나 슈만 특유의 시상이 전곡에 흐르고 있어 낭만파의 개성 또한 잃지 않고 있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 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