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 명연주 이야기

이 곡은 많은 내로라하는 현악 4중주단이 이 곡의 비극적인 정서를 표출하고 있지만 부쉬 현악 4중주단(Busch Quartet)의 눈물 어린 연주에는 이르지는 못한다. 특히 SP 복각의 그리 좋지 못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이 연주는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부쉬 현악 4중주단은 독일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돌프 부쉬가 주축이 된 것으로 그의 형제들은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가들이었다.

아돌프는 1912년 빈 콘체르트페라인 오케스트라(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악장이 된 후 이듬해 빈 콘체르트페라인 현악 4중주단(Wiener Konzertverein Quartet)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세계 대전 발발로 활동이 중단되었고 다시 전후에 1919년 부쉬 현악 4중주단을 재결성하여 33년간 활동하며 음악 연주사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들은 몇 번의 단원 교체가 있었고(물론 아돌프는 변함이 없었고) 이 연주를 맡은 단원들은 제2대 시절도 그들의 전성기 시절의 녹음이 된다.

부쉬 현악 4중주단의 연주는 요즘의 연주 경황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전시대의 유물 격인 포르타멘토(portarmento) 주법이 남아 있고, 완벽한 조형과 예리한 분석보다는 감성에 치중한 고풍스런 그야말로 옛날풍 연주 그 자체이다. 거칠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의 앙상블이지만 이 엉성한 앙상블 내면에는 서로 간의 음악적 감성의 따듯한 조화가 감추어져 있어 그들의 시대를 초월하는 탁월한 음악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들의 연주는 곡 자체가 지니고 있는 비극적인 이미지가 로맨틱한 서정을 타고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고리의 조화보다는 음악적으로 치밀한 균형감의 깊은 감성이 돋보이게 되는 연주이다. 전편에 어두운 음영이 드리워져 있고, 곡에 대한 깊은 공감의 엄습이 비애의 감정을 꿰뚫고 있다.

특히 2악장 안단테에서 아련하게 거니는 듯한 슬픔의 읊조림은 저 깊은 어둠으로 꺼져 가는 듯한 한 소녀의 한없는 고뇌가 처절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눈물조차 훔칠 수 없는 슬픔은 인간적 숙명인 죽음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된다.

전체적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삶의 깊이를 토로함으로써 정말로 의미심장한 감동을 전해 준다. 그 어떤 현악 4중주단의 연주도 이처럼 깊은 사념과 진솔한 인간 정서를 표출한 예는 결코 없는 것이다. 부쉬 현악 4중주단이 들려주는 잿빛 어린 감동은 <죽음과 소녀>의 궁극적 본질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음반은 다소 음질이 떨어지기는 하나 좀처럼 잊혀지지 않은 감흥이 음질의 열악함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 재, 책과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