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angelo Corelli

아르칸제로 코렐리는 이탈리아 푸지냐노의 유명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낸 파엔차에서 음악의 초보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다.

그 후 13세에서 17세까지 거주한 볼로냐에서 조반니 벤베누티(Giovanni Benvenuti)와 레오나르도 브루뇰리(Leonardo Brugnoli)라는 유명한 볼로냐 바이올린 악파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탁월한 음악가에게 배웠고, 또 그곳에서 조반니 밥티스타 바사니에게 대위법도 배운 것 같다.

1670년에는 아카데미아 플라모니카에 들어갈 것을 허락받았다. 그 후 수년간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때에는 로마에서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있었으나 이 데뷔가 그다지 화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추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말이지만 이 시기에 코렐리는 평생에 몇 차례 가지기 어려운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 갔고 그곳에서는 륄리(Lully)가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모든 문을 모두 막아버렸다는 설과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와 바이에른 지방, 특히 뮌헨 등지를 여행했다는 설이 있지만 모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1708년에 나폴리에 간 사실을 제외한다면 1680년 이후 코렐리가 한번도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코렐리가 옮겨 살았던 당시에 이 불멸의 도시에서는 전의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어느 의미로는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궁정을 영위했다. 이 궁정에서는 음악가가 왕이었다. 이런 환경속에서 로마에 거처를 정한 이래 코렐리는 바이올린의 명연주자로서 또 지휘자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성공을 쌓고 있었다.

우선 1682년에 성 루이지 디 프란체지 교회의 성가대장이 된 그는, 1685년에는 최초의 12곡의 트리오 소나타집(2개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출판하였고 1687년에는 150인이나 되는 현악주자를 모은 기념할 만한 연주회를 크리스티나 여왕의 궁정에서 지휘했다. 같은 해에 코렐리는 팜필리(Pamfili) 추기경의 원조를 받게 되었으며 2년 후에는 다른 추기경 피에트로 오토보니(Pietro Ottoboni)를 섬기게 되었다. 이 추기경은 교황 알렉산드로 8세의 조카이며 그 이후 평생동안 코렐리를 도와 거처를 함께 했다.

코렐리의 영광은 은퇴하는 1708년까지 빛을 잃지 않았다. 이 1708년은 중요한 해로서 이 해에 그는 헨델과 알게 되었고(코렐리는 헨델의 한 오라토리오 지휘하기까지 했다), 알렉산드로 스카를라티와도 만났다. 1708년 코렐리는 그다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나폴리로의 연주여행을 하면서 위궤양을 앓게 되었으며 로마에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 이외의 작품은 가령 자신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주하는 것만큼 잘 해내지 못한 것 같았고, 나폴리에서는 스카를라티 작품의 어려운 곳을 잘못 연주하였으며 c단조로 작곡된 곳을 착각하여 장조로 연주했는데 끝까지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전해지고 있다.

코렐리는 성격적으로 상처입기가 쉽고 또 투쟁적인 측면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실패로 인해서 낙담했으며 얼마 후에는 은퇴하였고 공중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코렐리가 60세가 되던 해에 사망했을 당시에는 12곡으로 이루어진 콘체르토 그로소집 Concerti grossi op. 6의 출판 계획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인쇄출판되어 실현을 보았다.

또 미술품을 크게 애호한 코렐리는 귀중한 그림의 수집품들을 오토보니 추기경에게 증정하도록 유언했고 추기경은 답례로 코렐리의 묘비를 로마 판티온의 라파엘 묘의 곁에 세웠으며, 이 묘비에 새겨진 라덴부르그 Ladenburg 후작이란 칭호는 어떤 작품을 헌정한 답례로서 파라티나선제후 필립 빌헬름이 코렐리에게 내린 것이다.

이탈리아의 음악사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사실로 코렐리는 성악을 위한 작품을 전혀 작곡하지 않았다. 각각 12곡으로 이루어진 op. 1에서 6까지의 코렐리의 전작품에는 오페라와 종교곡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6개의 곡집 가운데 처음 4개는 1681년부터 1694년에 걸쳐서 로마에서 출판되었는데, 모두 2개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작품으로서 교회소나타와 실내소나타가 교대적으로 모아져 있다.

op. 5는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작품으로 1700년에 출판되었고, 마지막 op. 6은 콘체르토 그로소를 모은 것으로서 특히 정성을 들인 작품이다. 이것은 1735년에 런던에서 출판된 콘체르토 그로소집과 혼돈되는 경우가 많은데 런던의 작품은 op. 1, 2, 3, 그리고 5를 제미니아니가 편곡한 것이다. 또 코렐리의 작품은 대단히 많이 재판되었으며 그 중에서 알려진 것은 크리잔더 J. F. Chrysander에 의한 전집(1888~91 런던)으로서 요제프 요아힘이 교정한 것이다.

코렐리의 바이올린 주법은 제미니아니, 소미스, 가스파리니, 그리고 로카텔리 등 우수한 제자들의 손을 거쳐서 비오티와 로드에게 계승되었다. 이 양식을 본질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표현능력을 깊이 규명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단순한 명기교의 남용(가령 중음주법)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 되고 있다. 음역에 있어서도 제3포지션(즉 2점 D)을 넘어서지 않았다.

음악사에서 그의 최대의 공적은 합주협주곡의 형식을 확립한 점이지만 트리오소나타와 바이올린소나타도 그와 더불어 하나의 완성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기품이 넘치는 선율의 우미함과 균형이 잘 잡힌 형식감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낸 혁명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양식의 완성을 가져다 준 고전적인 예술가로서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제미니아니, 비발디, 로카텔리를 비롯하여, 독일의 J.S.바흐와 G.F.헨델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출처 : 클래식음악카페 필유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