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와 피아노 협주곡 2번
브람스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한 뒤 무려 20년이 흐른 1878년 2번 협주곡 작곡에 착수한다. 1번 협주곡 완성 당시 브람스는 이미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헝가리)에게 “2번 협주곡은 다른 울림의 작품이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면서 1번보다 더 나은 협주곡 탄생을 예고하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약속은 이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결실을 보게 된다.
물론 브람스 자신의 작곡 방식인 신중함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피아노 협주곡 말고 교향곡 1번이나 2번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 <대학 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등 명작의 발표에 더 많은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여러 다른 작품을 통한 관현악법에 대한 충분한 체험을 거친 그래서 더욱 숙달된 기량으로 그가 장담한 2번 협주곡의 준비에 더 신중을 기하였던 것이다.
1878년 브람스는 평소 동경하던 이탈리아로 첫 번째 여행을 친구인 빌로트와 떠나게 된다. 두 사람은 남국 땅에서 마술에 홀린 듯한 나날을 보내면서 청춘을 되찾은 듯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브람스 전기를 쓴 가이링거(Karl Geiringer, 1899~1989)도 “수 주일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은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이 기간만큼 자유롭게 마음대로 시간의 기쁨 속에 몸을 내맡긴 적은 그의 운명에 없었던 일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브람스는 이런 이탈리아를 무려 아홉 차례나 여행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이탈리아 음악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역시 그다운 것이기도 했다.
2번 피아노 협주곡은 이런 이탈리아 여행에서 착상을 하여 스케치를 남겼으나 본격적으로 작곡에 임한 것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두 번째 여행 직후인 1881년 프레스바움과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거의 단숨에 곡을 완성하였다. 이때 그의 아니는 48세로 1번 협주곡을 쓰던 20대는 아니었다. 이런 배경 탓에 곡은 브람스 특유의 중후함도 있지만 이탈리아의 낙천성과 명랑성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브람스는 친구이자 여류 피아니스트인 헤르초겐베르크(Elisabeth von Herzogenberg, 1847~1892)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말 사랑스럽고 연약한 스케르초를 가진 정말 작은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라고 했지만 이것은 그가 즐겨 쓰는 역설이기도 했다. 또한 독주 악기가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것이 아닌 관현악과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모습의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종종 피아노 교향곡으로 불리는데, 이것은 평론가 한슬릭(Eduard Hanslick, 1825~1904, 독일)이 ‘피아노의 오블리가토(obbligato- 피아노 또는 관현악 따위의 반주가 있는 독창곡에 독주적 성질을 가진 다른 악기를 곁들이는 연주법)를 갖는 교향곡’이라고 평한 데서 유래한다. 또한 니이만은 이 곡을 ‘독주자에게 피와 땀을 요구하는 난곡(難曲)’이라고 했는데 곡의 기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문제를 동시에 지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곡은 일반적인 협주곡 양식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보통 이전의 협주곡은 2악장에 느린 템포의 아다지오(adagio) 등을 갖춘 3악장이었으나, 이 곡은 2악장(allegro)에 스케르초(scherzo)를 사용 마치 교향곡과 같은 4악장을 취하고 있다.
1악장은 서두(序頭)에 은은히 울리는 호른 독주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2악장은 앞서 말한 스케르초 악장에 해당되는 것으로 정열적이며 익살스럽다.
3악장 안단테(andante)는 첼로와 피아노의 대화풍의 낭만적 정서가 일품으로 남고 북 즉 진중한 북부 독일과 아늑하고 맑은 이탈리아의 조화이다. 그러면서도 심원함마저 감돌고 있다.
4악장은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무곡풍으로 환희의 춤이라 하겠는데 영국의 평론가 토베이(Donald Francis Tovey, 1875~1940)는 ‘위대하며 천진난만한 피날레’라고 하였다.
곡은 전체적으로 길이가 길어 감정의 폭도 광대한데 서정적인 동시에 극적인 분위기에 싸여 있어 그 아름답고도 풍부한 악상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조화가 마치 실내악을 확대하여 놓은 것과 같고 스케일에 있어서도 영웅적이지만 결코 과시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장대하지만 화려하지는 않고, 심오하면서도 1번 협주곡처럼 비극적인 어둠은 없다.
한마디로 비르투오조적인 것과 시적(詩的)인 것, 고전주의적인 것과 낭만주의적인 것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으로 고요한 장엄, 불타는 정열, 친밀한 서정이 공존하는 피아노 협주곡의 걸작이다. 브람스 자신의 인생의 낙조가 닥치기 직전 고독하지만 아름답게 채색되어진 한 폭의 드라마틱한 삶의 궤적이라고 하겠다.
출처 : 불후의 클래식(허 재, 책과음악)